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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카 Jan 17. 2023

나의 사회공포증 증상 (1)

- 중학교, 고등학교

중학생 때부터 친구들 앞에 서는 것이 무서워졌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대안학교 학생으로 다니면서 주입식 교육보단 친구들과 토론하는 문화에 많이 노출됐고, 나에게 시선이 집중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싶었지만 동시에 두려워했다.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사람들의 관심이 싫었던 게 아니고 사람들로부터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주목을 받는 상황도, 내 존재가 묻히는 분위기에서도 스트레스를 받았다. 만약 단순히 내성적인 성격이었다면 이렇게까진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 상반된 두 상황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점점 자신을 스스로 무리에서 소외시켰다.


이러한 성향은 고등학생이 되면서 더 커졌다. 중학교 때부터 친했던 친구들로부터 관계가 멀어졌다. 그들이 나를 괴롭힌다거나 따돌린 것도 아닌데 내가 스스로 거리를 뒀다. 함께 있으면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어주지 않을 것 같았고, 그 상황은 내가 매력 없음을 보여주는 듯 느껴져서 견디기 힘들었다. 용기를 내서 먼저 친구들에게 말을 걸면 무시당할 거란 불안이 나를 막아섰다. 말조차도 걸지 못하는 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져 더욱 실망했다.


우리 고등학교 커리큘럼은 대학교처럼 학생 스스로 시간표를 짤 수 있어서 모든 학생이 동시에 수업을 듣지 않아도 됐다. 덕분에 나는 혼잡한 점심시간을 피할 수 있었다. 많은 학생이 식당을 이용하는 시간엔 일부로 도서관에 숨었다. 도서관에 비치된 만화책(식객, 미스터 초밥왕 등)을 읽고 또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점심시간 끝 무렵, 슬며시 내려가 혼자 밥을 먹었다. 친구들과 같이 식사하는 것 자체가 불편했고, 그렇다고 혼자 먹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도 않았다. 매일매일 식사시간마다 눈치를 보며 지냈다.


이러한 ‘자발적’ 소외가 시작된 시점은 명확하지 않다. 대놓고 나를 따돌린 친구는 없었고, 물리적 폭력에도 노출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으로 넘어가는 시점에 부모님과의 갈등, 가정에서 느끼는 정서적 불안정이 극대화되었던 시점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과거부터 아버지의 주사(酒邪)는 꽤 오랫동안 유지됐다. 그 탓에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계는 좋지 못했고, 어린 시절부터 나는 긴장 속에서 살았다. 폭력적인 언행에 자주 노출됐고, 그 마음의 상처가 가슴 깊은 곳에 아직도 남아있다. IMF의 여파마저 우리 집에 도달하면서 경제적인 어려움마저 심화했다. 돈 문제로 땅 꺼질 듯 내쉬던 어머니의 한숨 소리는 항상 내 심장을 철렁하게 하였다. 정서적,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부모로부터 버림받을 수도 있다는 '유기 불안'은 오랜 시간 내게 머물렀다.


이처럼 학교에서 불안을 느끼고, 하교 후 귀가해도 안정을 찾을 수 없었다. 하루는 샤워하고 있는데 진지하게 삶을 끝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 우울했다. 아무리 온수(溫水) 샤워를 해도 내 삶에선 따뜻함과 안정을 느낄 수 없다는 사실에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불안을 느낄 뿐이니 나는 '게임'으로 도피했다. 다행히도 술, 담배, 범죄와 관련 없는 귀여운(?) 일탈이었지만 삶의 균형은 와르르 무너졌다.


본격적으로 PC방을 전전했다. 수업이 끝나면 바로 PC방으로 향했다. 방학 땐 온종일 PC방에 살았다. 물론 어머니께는 학교 또는 도서관에 간다고 거짓말을 했다. 방황하던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어느 날, 텅 빈 인근 학교 운동장에 앉아 근처 만화책방에서 빌린 만화책들을 읽으며 어머니가 싸주신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꾸역꾸역 음식물을 목으로 삼키면서 공허한 운동장을 보는데 매우 서글픈 감정이 사무쳤다. 친구들과 한창 어울리고 공부해야 하는 시점에 아무도 없는 학교에서 처량하게 혼자 만화책을 읽고 있는 내 처지가 한탄스러웠다. 미칠듯한 외로움이 나를 감쌌다. 이를 견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게임뿐이었다. 어두운 공간 속에서 게임에 몰입할 때야말로 현실의 고뇌를 잊을 수 있었다. 그 당시 내 장래희망은 두 가지였다. (1) 고등학교 졸업 후, 혼자 원룸 오피스텔에서 게임만 하며 살기. (2) PC방 아르바이트를 통해 번 돈으로 PC방에서 게임만 하며 살기. 두 장래희망의 공통점은 ‘혼자’ 지낸다는 점에 있다. 지금이야 피식 웃는 소원이지만 당시엔 정말로 진지한 목표였다. 그만큼 나는 하고 싶은 것도 없었고, 하고 싶은 것을 찾을 여유가 없었다. 그냥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갈 뿐이었다.


무기력한 상태에서 학업을 챙기는 건 욕심이었다. 공부해야 하는 동기조차 없었을뿐더러 공부하는 방법조차 알지 못했다. 자존감이 바닥인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건 자포자기밖에 없었다. 고등학교 내신 성적 평균 5등급, 모의고사에서 6~7등급은 기본이었다. 점수가 나올 때마다 "역시 나는 안돼" 부정적인 목소리는 더 강화됐고, 이어지는 부모님의 실망에 나 자신이 더 싫어졌다. 자신을 가치 없는 사람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졸업 후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중학교 친구 한 명이 급사(急死)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하고자 어머니와 집에서 멀지 않은 장례식장에 조문을 갔다. 그런데 장례식장에 가까워질수록 불안했고 심장이 빨리 뛰었다. 오랜만에 학창 시절 친구들을 만나는 것뿐인데 숨쉬기 힘들 정도로 공포를 느끼는 현상이 이해되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을 이토록 두려워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장례식장에 도착한 후, 서둘러 조문을 하고 어머니께서 잠깐 머무는 동안 밖으로 도망치듯 나왔다. 이미 도착한 친구들이 있었을 텐데 인사조차 하지 않고 뛰쳐나왔다. 그들의 눈을 마주치기 무서웠다. 그리곤 장례식장 주차장 근처를 서성이며 밤하늘에 원망을 쏟아냈다.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는 건가?! 왜?!!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말이다!!" 너무 속상해서 눈물이 쏟아졌다. 이해되지 않는 공포가 증오스러웠고, 그것에 굴복하고 도망치는 나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이 복합적인 감정이 뜨거운 눈물에 포함되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당시의 감정은 아직도 생생하다.


중고등학교 시절의 교우 관계는 나에게 특별하다. 대안학교 특성상 한 학년 정원이 60~80명으로 소수였고, 짧게는 3년, 길게는 6년을 동고동락했기 때문에 의미가 소중할 수밖에 없다. 이 각별함은 내 심적 고통을 악화시켰다. 중고등학교 친구들과 교류가 끊어지면서 인간관계 자원이 소멸하는 위기의식을 받았기 때문이다. 불안감은 생각보다 강했는데, 그 결과 절망적인 미래의 내 결혼식에 대한 상상으로 이어졌다. 하객으로 와줄 친구가 떠오르지 않았고, 결혼식 사진을 찍을 때 휑할 내 지인석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이 공포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최악의 상황을 피하고자 결혼식 하객 알바 고용을 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을 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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