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전 편 >
나는 도전하는 것을 좋아한다. 어릴 적부터 힘든 활동을 즐겼다. 예를 들어 초등학생 캠프에서 국토종단, 횡단을 완수했고, 학창 시절엔 자발적으로 울릉도 일주, 제주도 자전거 일주, 히말라야 등반 등을 완료했다. 군대 전역 후엔 친구와 자전거로 전국 무전여행(無錢旅行)을 시도했다. 태생부터 어려움을 극복하고 난 후 얻는 성취감에 취해서 모험을 좋아했던 것 같다. 이러한 성향 때문인지 몰라도 외로움에 마냥 당하지만은 않았다. 꺾일지언정 부러지지 않겠다는 각오를 품고, 이 고난을 극복하겠다는 집요함이 발휘됐다. 지고는 못 사는 오기가 작동한 것이다.
효과적인 해결 방안은 몰랐던 까닭에 맨땅에 헤딩하듯이 여러 방법을 시도했다. 그중 하나가 '대학교 홍보단'에 가입하는 것이었다. 홍보단과 인연의 시작은 고등학생 3학년 1학기 막바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막 기말고사 마지막 영어 시험이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담당 선생님께서 'XX대학교'라는 곳에서 홍보단이 왔으니 관심 있는 사람은 학교에 남으라고 안내했다. 당시만 해도 해당 대학교의 이름은커녕 포항이라는 지명까지 몰랐다. 아주 낯선 곳이었다. 그러나 이상한 끌림을 느꼈다. 홍보 행사에 참석해야만 할 것 같은 본능이 강하게 든 것이다. 그래서 원래 가려던 PC방마저 포기하고 홍보회에 참여했다. 홍보단원들은 자신들을 소개했다. 준비된 홍보 영상을 시청한 후, 홍보단원과 만났는데 그 순간 "이 대학교에 반드시 입학해야 한다"라는 생각이 강하게 뇌리에 박혔다. 마치 영화 같은 장면이었다. 해당 대학교에 첫눈에 반해버린 나는 속으로 상상했다. 입학 후 홍보단원이 되어 내년 저 자리에 서 있는 모습을 말이다.
대학교에 입학하는 과정은 참 다이내믹했다. 낮은 내신 점수 때문에 내가 합격하리라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나조차 희망이 없던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입학할 수 있었고, 결국 홍보단에 입단 원서를 제출할 여건이 갖춰졌다.
홍보단은 학교의 대외적인 얼굴이었다. 하지만 사회공포증 때문에 사람과 대면하는 것에 있어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던 시절이었다. 도무지 홍보 활동이 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본능적인 이끌림과 꼭 해야 한다는 절심함이 있었다. 지난번 고등학교 홍보회 때 상상했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해야만 했다. 나는 용기를 내서 도전했다. 결국, 서류 전형과 면접 끝에 홍보단 7기로 선정됐다. 그리고 다음 해 여름방학 때 모교를 방문해서 내 상상을 실현했다. 이러한 짜릿한 경험은 내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모든 구성원이 나를 챙겨주었음에도 홍보단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그 원인은 나로부터 기인했는데 '사람들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라는 명제가 마음 깊숙이 뿌리 박혀 있었다. 그래서 나를 향해 짓는 미소의 진위를 의심했다. 나의 아이디어가 칭찬을 받으면 곧 비난받진 않을까 불안했다. 내가 어설프고 매력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나를 헐뜯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홍보단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사람들의 대화가 멈추는 상황을 나를 뒷담하고 있었다며 왜곡해서 받아들였다. 나의 정체성을 '환영받지 못하는 자'라고 믿어버리니 마음이 점점 더 위축됐고, 홍보단실로 향하는 계단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길처럼 매우 불안했다.
어느 날 기숙사 계단에서 친했던 동기 한 명에게 내 고민을 털어놨다. "홍보단 선배들이 나를 싫어하는 것 같아"라는 말을 듣자마자 그 친구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야,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라. 선배들이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내가 질투가 날 정도라고" 말이다. 실제로 나에 대한 선배들의 관심과 사랑이 있음을 알았다. 또 좋은 동기들 덕분에 약 2년 동안의 홍보단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매력이 없어. 사람들은 나를 좋아하지 않아'라는 뿌리 깊은 믿음이 현실을 비틀어 버렸던 것이다.
그래도 학기 중엔 견딜 수 있었다. 문제는 '여름방학 전국 고교 투어'를 할 때였다. 여름방학마다 2~3주 정도 전국 고등학교를 돌아다니며 학교 홍보를 진행했다. 낮부터 밤까지 구성원들과 함께 지내야 했기에 긴장감을 종일 견뎌야 했다. 특히 투어 시작 전날 불안함은 절정을 찍었다. 호흡이 어려울 정도로 가슴이 답답했고, 당연히 수면을 취할 수 없었다. 문제의 그날도 게임으로 현실에서 도피하며 밤을 새우고 있었다.
여름 투어 떠나는 새벽 5시 30분쯤, 다가오는 출발 시각에 안절부절못하며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때 출근을 위해 아버지가 기상하셨다. 당시엔 컴퓨터가 거실에 있었는데, 잠도 안 자고 게임을 하는 아들의 모습에 화를 크게 내셨다. 어차피 고충을 토로해 봤자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에 그동안 말을 하지 않았고, 가족도 내 고민을 몰랐다. 그래서 연유를 모르는 아버지는 종일 게임만 하는 아들이 불만족스러웠고, 가뜩이나 예민했던 나는 아버지께 대들었다. 결국 부자(父子)는 서로 얼굴을 붉힌 채 헤어졌다. 이 소란으로 어머니가 잠에서 깨셨다. 그리곤 거실에서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로 정신이 나가 있던 나를 발견하셨다.
감정이 폭발한 나는 처음으로 내 상태를 어머니께 털어놓았다. 낯선 곳에서 적응하기 힘들다는 점,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느낀다는 점들을 고해성사하듯이 내뱉었다. 특히 불특정 남성과 길에서 마주치면 그가 나를 해칠 것 같은 불안에 극도로 긴장된다고 고백했다. 이야기를 들으신 어머니는 그제야 아들의 상태에 대한 심각성을 깨달으시곤 큰 충격을 받으셨다. 이것이 절대 가벼운 사안이 아니라는 위기감을 느끼셨다. 어머니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슴이 찢겨 나갈 정도로 마음이 쓰라리셨단다. 그리곤 정말 오열하시며 우셨다. 안타까움, 미안함, 죄책감 등 오만가지 감정이 눈물에 섞여 흘러나왔다.
예상 없던 폭로(?) 사건은 변화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그 이후부터 힘든 순간이 찾아오면 어머니의 정서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이젠 나에게도 격려를 받을 수 있는 자원이 생긴 것이다. 가장 가까운 관계인 어머니의 응원은 큰 힘이 됐다.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엄청난 위안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서로 더 이해하고, 함께 상황 개선을 위한 방법들을 찾기 시작했다. 더는 거짓으로 괜찮은 척 행동하지 않아도 됐다. 드디어 절대적인 고립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