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대 (해병대)
반드시 가야 하는 군대로 '해병대'를 선택한 이유는 변화의 욕구에 있었다. 인간 용광로로 불리는 해병대에 입대하면 나약한 성격을 개조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1년 7개월의 해병대 경험을 모두 풀자면 책 한 권 분량이 나올 정도이다. 여기선 사회공포증을 통해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만 정리하려고 한다.
훈련병 시절엔 육체적인 고생이 심한 까닭에 심리적인 고통은 덜했다. 다시 한번 매슬로우의 욕구 단계이론을 대입해 보면 훈련소 생활엔 가장 기본적인 욕구 단계인 '생리적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다. 항상 춥고, 배고프고, 졸려서 고차원적인 ‘소속의 욕구’가 생길 여력이 없었다. 훈련 과정을 수료한 후 자대 내무반 생활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나는 백령도로 배치됐다. 육지에서 떨어진 섬이라는 특수성은 사회로부터 이중으로 차단된 인상을 주었다. 그래도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시간이 흐를수록 그곳에서의 삶에 점점 적응했다. 하지만 인간관계만큼은 도무지 편안하지 않았다. 오히려 막내 시절엔 괜찮았지만, 조금씩 선임들과 친분이 생기고 후임들이 늘어날수록 관계 형성에 어려움을 겪었다.
일단 해병대의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분위기가 나를 힘들게 했다. 작은 실수도 용납되지 않았고 후임에 대한 물리적, 언어적 폭력이 허용됐다. 폭력은 강한 군기의 토대로 여겨졌다. 당시엔 이러한 분위기가 팽배했다. 항상 긴장을 강요하는 분위기에 노출되니 자존감이 낮았던 나는 더욱 큰 불안감을 느꼈다. 만약 나에게 여유가 있었다면 선임들의 구박에도 능청스럽게 대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고, 몸과 마음 모두 부자연스럽게 경직되고야 말았다.
공동체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나는 선임들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물론 나뿐만 아니라 많은 후임이 장난이라는 미명하에 괴롭힘을 당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선임의 기분에 맞추어 웃고 넘긴다는 점에서 나와 달랐다. 예를 들어 한 선임이 내 외모를 두고 비하 발언을 하거나 코털을 뽑는 등 물리적 학대를 시도하면 나는 정색하며 저항했다. 상대방에게 얕보이면 무시당한다고 자신을 보호했던 것 같다. 그렇게 선임들과의 관계에서 굉장히 방어적인 태도를 보였다. 당연히 선임들 눈에는 내가 못마땅했을 것이다. 내가 무리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신호를 보내자 그들은 굶주린 늑대처럼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놀림과 장난이 나에게 집중됐고, 그 강도도 심해졌다. 틈만 나면 나를 지목해 비하 발언 및 물리적 폭력을 행사했다. 그리고 무리에서 나를 더욱 소외시켰다. PX(매점)를 가거나 좋은 소식이 있을 땐 나를 배제했다.
따돌림의 주체가 선임에서 후임으로 확대됐다. 초반엔 선임들의 지시로 나를 무시하기 시작했지만, 점차 자연스러운 분위기로 이어졌다. 나는 저녁 연등시간에(소등 이후 취침시간에 TV 시청 또는 독서, 공부할 수 있다) 1층 도서관을 애용했다. 그 순간만큼은 사람들에게서 벗어나 나만의 시간을 온전히 즐길 수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던 어느 날, 같은 생활관을 사용하는 후임 한 명이 나를 찾아와 지금 당장 생활관으로 올라오라고 했다. 나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 선임이 나에게 복귀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다. 무슨 일인가 의아해하며 계단을 올랐다. 이미 불을 끈 어두운 내무실에서 모두가 자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선임은 나에게 공개 망신을 줬다. 후임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매일 도서관에 가는 내가 못마땅하다면서 후임들에게까지 나에 대한 비난을 지시했다. 나는 후임들로부터 공개적으로 비난을 들어야 했고 자아비판을 강요받았다. 인민재판이 따로 없었다. 이 사건은 내 마음을 더욱 위축시켜서 이후 후임들에게 말을 걸거나 지시를 하기가 어려웠다. 그럴수록 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했고, 그러한 모습은 아이러니하게도 나에 대한 비난과 소외의 명분을 제공했다.
북한의 연평도 포격 사건의 여파로 새로운 부대가 창설됐다. 나는 일부 중대원들과 차출되어 부대를 백령도에서 대청도로 이전했다. 이후, 부대 조리병 한 명이 관심 병사로 낙인찍혀서 대대 목욕탕 관리병으로 전출 갔고, 내가 임시로 3개월간 조리병과 역할을 맡기로 했다. 짧았던 기간이었지만 나름 즐거웠었다. 서먹한 소대원들과 떨어질 수 있었고, 삼시 세끼를 준비하다 보면 하루도 금방 지나갔다. 문제는 약속된 3개월이 끝나서 소대로 복귀해야 했던 시점이었다. 어느 날 부소대장이 나를 은밀하게 불렀다. "상처받지 말고 들어라. 소대원들이 네가 복귀하는 것을 싫어해. 차라리 다른 소대로 보내면 안 되겠느냐고 하더라". 환영받지 못한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불안감 때문에 답답한 가슴을 뚫고 심장 소리가 요동쳤다. 주위엔 내 편이 없었다. 나는 극도의 외로움을 혼자서 견뎌야 했다.
소대에 복귀한 어느 날, 술 취한 소대장이 우리 내무실로 들어왔다. 그는 자는 척하던 내 옆에서 다른 병사들과 나에 대한 뒷담을 했다. 내가 리더십이 없어서 후임에게 분대장을 맡겨야겠다며 소대 막내에게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나에 대한 부정적 이야기를 자는 척 듣고 있어야만 했다. 또 한 선임은 내 일기장을 몰래 꺼내 보기도 했다. 타인에게 내 치부가 노출되었다는 사실에 수치스러웠다(아이러니하게도 일기의 심각한 내용을 본 선임은 내가 자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는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그동안 일기를 작성하며 감정을 통제했는데 이것마저 안전하지 못했다.
잠을 잘 때를 제외하곤 아침, 점심, 저녁 모두 긴장한 상태로 지냈다. 대인관계에 대한 두려움은 매일 스트레스를 유발했다. 상대방이 언제 공격할지 모른다는 불안에 경직됐고, 집단에 쓸모없는 존재로 인식되는 것은 공포로 다가왔다. 소대 단위로 모임을 하면 이러한 인식이 확대되어 무척 불안했다. 부대원들이 나에게 말을 걸거나 장난을 치는 빈도가 줄어들었고, 그럴수록 나는 위축되어 더 소극적으로 행동해 주변 사람들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매우 어려웠다.
외로움이 절정에 이르자 삶에 대한 애착이 사라졌다. “현재 건강한 대인관계를 맺지 못하는데 훗날 사회에 나가서도 똑같지 않을까?”, “평생 이렇게 외롭고 쓸쓸하게 살아야 할까?”, “영영 사랑받지 못할까?”, “나는 매력 없는 존재가 아닐까?” 그렇다면 더 이상의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여기서 삶을 포기하는 게 외로움을 끝내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싶었다. 아무도 내 고민을 이해할 수 없다고 믿었고, 어떠한 해결책도 떠오르지 않았다. 변화 가능성에 대한 일말의 희망도 찾을 수 없었다. 이러한 절망감이 나를 압도했다.
근무지가 섬이었기 때문에 휴가를 나올 기회가 적었다. 대신 한 번 휴가를 나오면 보통 15박 16일 정도를 받았다. 손꼽아 기다린 휴가가 시작되어도 만날 친구가 없었다. 사실 ‘친구를 만나고 싶지 않다’는 것이 더 정확했다. 부대에서 관계 때문에 지칠 대로 지쳤는데 또 긴장감을 느끼면서까지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온종일 집에 틀어박혀 방에서 나오지 않고 게임으로 휴가를 보냈다. 약 2주 동안 은둔 생활을 하다가 복귀 날이 다가오면 도살장에 끌려가는 짐승처럼 불안했다. 나는 군부대에서도, 집에 돌아와서도 언제나 혼자였다.
눈앞에 닥친 고통을 회피할 기회는 있었다. 다른 부대로 전출 가기 위해 상급자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관심 병사로 분류되는 방법이 대표적이다. 현재의 고통으로부터 당장 분리될 수 있기 때문에 마음이 혹했다. 더불어 관심 병사를 대대 목욕탕 관리병으로 보낸다는 소문을 듣곤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결국엔 끝까지 버티기로 마음먹었다. ‘현실로부터의 도피’로는 문제의 근본 해결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도망치면 끝이다. 지금 변화하지 않으면 계속 반복될 것이다!!” 이 절규는 나를 극한의 상황으로 내몰았지만, 훗날 변화의 동력이 되었다.
그래도 국방부 시계는 움직였다. 하루하루 버티다 보니 전역 날이 가시권에 들어왔다. 깜깜한 터널 끝에서 한 줄기 빛을 바라보듯, 해방의 날이 다가온 것이다. 하지만 흥분과 설렘에 비례해서 걱정도 커졌다. 부대 정문에서 모든 부대원이 전역자를 배웅하는 전통이 있었는데 함께 전역하는 내 동기만 챙겨주고, 나는 무시할 것 같았기 때문에 불안했다. 내가 외톨이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확인하는 것이 죽도록 싫었던 난 전역 당일까지도 전전긍긍했다. 그러나 우리가 부대를 떠나는 순간엔 모든 부대원이 부대를 떠나 있어서 다행히도 걱정한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긴장의 연속이었다. 비로소 내 인생에서 가장 외롭고, 불안하고, 비참했던 1년 7개월간의 해병대 군 생활이 종료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