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문의 May 13. 2023

[병원인턴] 수술방 인턴

첫 수술방 인턴의 좌충우돌 적응기


나는 수술방이 좋다.

나는 수술방 특유의 분위기를 좋아한다.

수술방의 공기는 마치 고즈넉한 가옥의 그것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아있다.

외부 공기에 섞여있는 먼지나 미생물이 방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일정 수준의 압력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이 시스템 덕분에 수술방 문턱을 넘는 순간 주변의 소음은 사라지고 기분 좋은 먹먹함을 느낄 수 있다.

잠수하며 느끼는 포근한 먹먹함처럼 말이다.

물의 압력을 대신 만들어주는 양압기 덕분에 수술방에 들어갈 때면 마치 잠수라도 한 것처럼 내 마음도 편안하게 가라앉는다.

양압과 더불어 수술방 문을 경계로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수술방 특유의 긴장감과 편안함이 공기

환자 모니터링 기계에서 새어 나오는 규칙적인 알림음

수술방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잔잔한 노래

환자에게 집중하는 사람들의 열정

이렇게 수술방을 좋아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점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수술 자체도 퍽 매력적이다.

나는 인과관계가 명확하고 단순 명료한 것들을 좋아한다.

'이 행동을 했기 때문에 이 결과가 나왔다' 이 과정이 명쾌하고 확실할수록 편안함을 느낀다.

이런 성향 탓인지 여러 방면으로 해석이 가능한, 다른 말로 하면 '애매모호한' 미술은 내게 범접이 불가능한 영역이다.

수술에 흥미를 느끼는 이유도 내 성향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한다.

모든 치료 중 인과관계가 뚜렷한 치료는 수술이다.

나는 몇 주씩 내과적 치료를 하며 환자가 나아지는지를 지켜보는 것보다는 수술을 통해 확연하게 달라지는 환자를 보는 것에 편안함을 느낀다.

또한 눈에 보이지 않는 과정들을 추론하며 골머리를 앓는 것보다 직관적으로 눈으로 보고 칼로 절개하고 실로 봉합하는 걸 선호한다.

환자의 치료를 온전히 컨트롤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절개 하나 봉합 하나 집도의의 손에서 시작되어 집도의의 손으로 끝난다.

내 손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므로, 수술 결과의 책임은 온전히 집도의에게 있다.

환자를 치료하는 데에 있어 집도의의 수술 실력 이외에 다른 요소들이 침범할 여지가 적은 단순 명쾌한 수술은 정말 매력적이다.



이번 달에는 성형외과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3월 소아과, 4월 내과를 지나 처음으로 수술과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처음으로 수술과에서 근무를 하는지라 많이 긴장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드디어 수술과에서 근무하게 되었다는 기쁨이 있었다.

우리 병원은 내과계열 인턴과 수술 계열 인턴들은 서로 다른 근무복을 입는다.

소아과와 내과에서 일할 때는 민트색 근무복을 입었었는데, 이번 달부터는 새파란 수술복이 나의 새로운 근무복이 되었다.

수술방 안팎을 돌아다닐 일이 많은 수술과 인턴들은 수술방 안에서는 파란 수술복을 입고, 수술방 밖에서는 오염을 막기 위해서 그 위에 가운을 걸친다.

수술복은 이전에 입던 근무복에 비해 더 부드럽고 편했다.

오랜 시간 한자세로 수술해야 하는 의사들의 편안함을 위해 이렇게 만들었을까?

실용성으로 보나, 색깔로 보나 내 취향에 더 가까운 이번 근무복이 나는 참 마음에 든다.



근무 날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설렘보다는 불안감이 커져갔다.

우리 병원에서는 내가 처음으로 성형외과 근무를 하기 때문이었다.

내과나 외과처럼 환자 수가 많은 메이저과가 아닌 마이너과들은 배정되는 인턴도 적다.

성형외과를 예로 들면 상반기에 2명 하반기에 2명으로 1년 동안 인턴이 있는 날이 총 4달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 병원에서 작년에 근무했던 인턴 선생님으로부터 인계를 받은 지는 두 달도 더 지났고, 그 사이에 성형외과의 시스템이 많이 바뀌었다.

근무에 관해 물어볼 곳도 정보를 구할 곳도 마땅치 않은 상황

심지어 마지막으로 수술방에 들어가본지 1년이 훌쩍 넘어있었다.

그때는 실습 학생으로서 준비가 끝난 수술방에 들어가 참관을 하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수술 준비를 하는 인턴이다.

그때는 돈을 내고 입장이었지만, 이제는 돈을 받는 입장이기에 잘 모른다고 일을 못해서는 안되는 상황이었다.

불안은 이 상황을 컨트롤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오는 법

이미 수술과를 돌았던 동기들에게 부탁해 수술방 근무에 대해서 배우고, 미리 성형외과 레지던트 선생님들께 연락해 달라진 근무에 관해서 설명을 들었다.

그렇게 수술과 근무에 대한 지식이 조금씩 쌓일수록 불안감은 비례해서 줄어들었고 굳은 마음가짐으로 성형외과 인턴 근무를 시작했다.



성형외과 인턴은 주로 수술방에서 근무한다.

6시에 출근해서 당일 명단을 만들고, 교수님 회진을 돌고 나면 곧장 수술방으로 직행한다.

한번 들어간 수술방에서 들어가면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퇴근하기 직전까지 있는다.

내 까무잡잡한 피부가 조금이나마 하얘질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근무 첫날 수술방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으면서 여러 상념에 잠겼다.

2022년에서 고작 1년이 흐른 것뿐인데 작년과 지금의 나는 많은 점이 달라져 있었다.

수술 참관이 목적이었던 작년에는 때문에 학생을 뜻하는 핑크색 수술방 모자를 썼었지만 이제는 병원 직원을 의미하는 하늘색 모자를 쓴다.

수술복이 초록색이었던 모교 병원을 떠나 수술복이 파란 병원에서 근무를 하고 있다.

앞가슴에 달린 명찰에는 '학생' 대신 '의사'라는 신분이 적혀있다.

나라는 사람은 그대로인데, 나를 둘러싸고 있는 많은 것들이 변해있었다.

문득 실습 때 한 교수님께서 해주셨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여전히 20대인 것 같은데 어느새 결혼을 했고 애가 태어났고 교수가 되어있더라'


그렇게 환복을 마치고 난 후 수술받을 환자가 있는 수술전 준비실로 향한다.

수술 카트에 누워있는 수많은 환자 중 성형외과 수술을 받을 환자분을 찾고, 이름과 생년월일, 수술과 와 수술 부위를 확인한다.

아주 간단한 과정이지만 애먼 환자가 멀쩡한 부위에 수술을 받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 꼭 확인을 하는 편이다.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은 실수를 통해 발전해나간다.

2003년 미국 정형외과 의사들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 5명 중 1명이 엉뚱한 부위에 수술을 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JKMA에서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도 5-10년마다 1차례씩 대학병원급에서 잘못된 부위에 수술을 하는 사고가 발생한다고 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수술 전 환자와 수술 부위를 확인하는 타임아웃, 다양한 환자안전 캠페인, 의사 교육 등이 점차 발전하고 있으며, 나는 여기에다 내가 할 수 있는 안전장치를 한차례 더 추가하고 있다.



환자 확인을 끝낸 뒤 수술 카트에 누워있는 환자를 끌고 수술방으로 이동한다.

수술 카트, 정식 명칭으로 스트레쳐 카 (Stretcher car)는 50kg으로 꽤 무겁다.

여기에 누워있는 환자의 무게까지 더해야만 비로소 인턴이 운전(?) 해야 하는 스트레쳐 카의 무게가 된다.

환자분이 40kg 대의 마른 여성일 수도 있고, 100kg가 넘는 거구의 남성일 수도 있다.

기본 카트 무게도 이렇게 무거운데 환자분의 체중까지 더해진, 100kg을 가뿐하게 넘는 카트를 끄는 건 상당히 운동이 많이 된다.

내과 때는 하루에 2만보씩 걸으면서 유산소운동을 했다면, 지금은 무산소 운동을 하고 있달까

하루가 다르게 탄탄해져 가는 전완근을 보며, 수술과 인턴은 일도 하고 운동도 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특혜를 누린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스트레쳐 카 / 출처 : 케어룸 의료산업(주)


수술방까지 환자를 모셔간 후, 수술방 정중앙에 놓인 베드로 환자를 이동시킨다.

이 과정에서 혹시나 떨어지면 큰일 날 수도 있으니 엉덩이로 조금씩 움직이라고 꼭 안내해야 한다.

그 후 환자분을 태우 고온 스트레쳐 카를 수술방 밖으로 빼낸 뒤, 본격적으로 준비를 도와드린다.

전술했듯이 우리 동기 중 성형외과 인턴은 내가 처음이었고, 심지어 인계를 해준 작년 인턴 선생님은 수술방에 환자를 넣는 것까지만 했었다.

수술과를 이미 돌았던 동기들도 환자를 수술방으로 모시는 것 그리고 수술 중 손이 필요할 때 어시스트를 하는 일만 했다고 하니 이제부터는 아는 것이 없었다.

한 가지 물음만이 공허한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무언가를 하고 싶어도 뭘 해야 할지 몰라 어물쩍대는 나와는 달리, 본인의 일을 찾아서 척척하시는 선생님들이 보인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수술방 한가운데 덩그러니 있는 내 스스로가 그렇게 바보 같을 수가 없었다.

아는 게 없으면 물어보고, 또 모르면 알 때까지 혼나면서 배우는 수밖에 없다.

어떤 수술에 어떤 수술바디가 필요한지, 또 암보다 나 헤드레스트는 어디에 어떻게 끼우고 어떻게 분리하는 건지

수술방 드랩을 할 때 선생님들을 어떻게 도와드려야 하는지

환자가 마취되기 전까지 옆에서 환자를 지키고, 마취과 선생님들께서 기관삽관을 할 때 손을 보태야 하는 기본 상식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다 새로웠다.

수술방에는 수술방의 흐름이 있었고, 그 흐름 위에 자연스레 올라타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느꼈다.

성형외과 인턴 첫날 나는 그 흐름에 올라타지 못한 조약돌이었다

흐름을 거부하며, 떠다니지 못하고 가라앉아버린 조약돌



준비가 모두 끝날 때쯤 교수님께서 들어오시고 본격적인 수술이 시작된다.

이제 나의 업무는 수술을 어시스트 하는 것이다.

의사가 되고 처음 서보는 수술 어시스트. 여기서 나의 역할은 무엇일까?

교수님께서 시키시는 것만 해야 하나?

뭐라도 해보려 이것저것 시도해야 하나?

시도한다면 어떤 상황에서 뭘 시도해야 할까?

처음 뵙는 교수님, 처음 보는 수술, 처음 보는 전공의 선생님들

하나하나 부딪히고 깨지면서 파악할 수밖에 없었다.

수술기구 잡는 방법, 무영등 맞추는 방법, 수술 과정을 읽는 방법, 상황에 맞는 어시스트 방법

두 눈을 부릅뜬 채 있는 눈치 없는 눈치를 다 끌어내며, 또 혼나가며 배워나갔다.

죄송합니다. 잘하겠습니다.

인턴을 시작한 뒤로 그동안 얼마나 많이 외쳤는지, 이제는 죄송하다고 말할 때 일말의 거리낌조차 없어졌다.

전쟁 같은 하루를 겪고 난 뒤 수술과 인턴이 갖추어야 할 2가지 덕목을 깨달았다.

바로 체력과 눈치

무거운 수술기구를 나르고, 팔다리를 들고 있거나 수술 부위를 오랜 시간 당겨야 한다

무엇보다 오랜 시간 서있으면서 집중력을 잃으면 안 되며, 상황에 맞는 어시스트를 해야 한다.

시키는 것만 잘하는 게 아닌, 해야 할 일을 스스로 찾아낼 줄 아는 능력, 또 그 일을 잘하는 능력

책으로 배우지 못하는 현장지식들, 그 지식을 행동으로 옮기는 빠릿빠릿함까지

배워서 되는 영역이 아닌 타고난 능력이 상당히 중요한 곳이 다름 아닌 수술장이었다.

'수술과는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전해져내려오는 말을 이제서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수술장면 / 출처 : 메디컬옵저버

수술이 끝나고 환자가 마취에서 깨어나면 환자를 회복실로 옮겨야 한다.

여기까지 마쳐야 수술 1개가 끝난 것이다.

그리고 또다시 전체 과정을 반복하기 위해 수술을 받을 환자가 누워있는 수술 전 대기실로 향한다.

점심시간이 되면 수술방에 있는 사람들이 번갈아가면서 밥을 먹기 시작한다.

점심을 먹기 위해 수술을 일시정지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수술 운영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 인력을 남기면서 밥을 먹고 온다. 이것을 '식교대'라고 한다.

내가 어시스트를 서고있는동안 SA 간호사 (Surgeon assistant) 선생님이 식사를 하러 가신다.

이후 SA 간호사 선생님이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시면, 손을 바꾸고 내가 밥을 먹으러 가는 시스템이다.

그래서 밥을 천천히 먹을 수가 없다.

수술방에 있으면 유독 빨리 배가 고파지는데, 내가 배고픈 만큼 다른 사람도 배고플 것이 분명하기에 아무리 길어도 40분 이내에는 밥을 먹어야 다음 사람이 밥을 먹을 수 있다.

또 동시에 얼마나 피곤한지, 수술방에 나오는 순간 긴장이 풀려서 누적된 피로가 한꺼번에 쏟아진다.

밥을 마시다시피 먹고, 그 잠깐의 시간을 아껴서 당직실에 누워 5분이나마 눈을 붙인다.

머리가 베개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침대가 몸을 삼켜버리는 느낌

그대로 정신줄을 놔버리고 싶은 욕구를 꾹 참으며 휴대폰 알람, 갤럭시 워치 알람을 둘 다 맞춘다.

혹시나 알람 소리를 못 들을까 편히 마음도 놓지 못한 채 눈만 감고 있다가 어김없이 울리는 알람 소리에 깊은 탄식과 함께 몸을 일으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술과는 여전히 매력적이다.

그중 수술방 안의 사람들이 모두 한 팀이 되어가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다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눈빛 하나만으로, 때로는 눈빛도 필요 없이 의사소통을 한다.

이때는 어떤 수술기구가 필요하고, 어떤 어시스트를 해야 할지 모두가 알고 있다.

수술이 잡음 없이 흘러가는 모습을 보면 이게 예술이지 예술이 따로 있나 하는 생각마저 들곤 한다.

비록 인턴이지만 성형외과에서 근무하는 동안 팀의 일원이 되고 싶다.

조약돌이 아니라 물 위를 따라 흘러가는 나뭇잎이 되고 싶다

오늘보다 더 일을 잘하는 내일의 내가 되고 싶다.

이전 10화 [병원인턴] 환자들의 컴플레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