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시끌벅적하게 시작했던 나의 푸르렀던 인턴생활도 어느덧 10개월이 흘렀다.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되어버린 나의 2023년 늦은 밤 당직 인턴끼리 시켜 먹던 치킨, 당직 없는 금요일과 이어지는 주말 투오프, 쌀쌀한 날씨와 함께 찾아온 첫눈보다도 우리 인턴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인턴 성적이 드디어 발표되었다.
국가고시에 합격을 해서 의사가 되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의사 면허증만 주어진다고 진짜 의사가 되지 못하기에 나는 인턴을 하며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걸 배워나갔다. 작게는 술기부터 많게는 주치의 업무까지 병원이라는 커다란 조직 속에서 가장 막내로 구르고 깨지며 일해온 10개월 과연 나는 윗사람들,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았을까
인턴으로 보낸 시간이 늘어날수록 더욱더 뼈저리게 느끼는 사실 하나
의사는절대로 혼자서 사람을 살려낼 수 없다
간호사 선생님, 주위 동료들, 교수님들, 거기에 환자를 이송해 주시는 이송 사원분들, 간호조무사 선생님들, 보안요원분들
수많은 직군의 사람들이 본인의 일을 잘 해내야만 그 끝에 환자의 회복이 있고 생명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정말 뼈저리게 느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인턴 점수에 '내가 하나의 공동체에서 얼마나 잘 적응을 하고 일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였고, 내가 부여한 의미만큼 인턴 성적에 대한 기대도 그리고 걱정도 커져만 갔다.
'인턴 성적을 배부하오니 수련교육부 사무실에서 찾아가세요' 인턴 성적은 예상 발표일보다 하루 먼저 나왔다. 이 소식을 들은 나와 동기들은 곧장 수련교육부 사무실로 향했고, 쉴 새 없이 발걸음을 옮기며 우리는 설렘과 불안함을 가득한 마음을 숨기지 못한 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느낌은 마치 롯데월드에서 바이킹을 타려고 줄을 서고 있는데, 이제 막 내가 탑승할 차례가 되었을 때의 느낌이었다. 그래 그 느낌이었다.
동기들과 함께 수련교육부 사무실에 찾아가니 각자의 이름이 적힌 갈색 서류봉투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그 안에는 지난 10개월의 내 모습을 평가한 서류 단 한 장이 들어있을 뿐이었는데, 마치 엄청나게 중요한 물건인 것처럼 느껴졌다. 막상 봉투를 받고 나니 마음속 가득 찼던 설렘은 긴장감으로 바뀌었다. 긴장감을 공기 중으로 흩어내려 크게 심호흡을 두어 번 하였으나 별 효과는 없었고 지난 10개월간 인턴생활이 머릿속에 파노라마 사진처럼 흘러가기 시작했다. 어째 칭찬도 받고 잘했던 적도 많은 것 같았는데 그런 생각들은 안 떠오르고 잘못했던 것들, 실수했던 것들만 떠올랐다.
나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지난 3월로 돌아가면 더 열심히 할 수 있냐고 아니 절대 못한다. 그럼 됐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열심히 했고 어떤 결과가 나오든 괜찮다. 마음이 급격하게 편해진 나는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사무실 안에서 그냥 봉투를 열어버렸다.
2023년 전공의(인턴) 근무 평가표
인턴 OOO
등급 A
얼떨떨함, 기쁨, 안도감 .. 많은 감정들이 물밀듯이 몰려왔으나 가장 크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감사함이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크고 작은 실수들도 굉장히 많이 했고 일 처리가 굼떴던 적도, 또 정말 무지했던 부분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런 바보 같은 인턴을 도와준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나는 조금씩 성장해 나갈 수 있었다.
이런 사람들과 함께 일할 수 있어서 나는 정말 운이 좋았다. 정말로운이 좋았다.
그러나 아직 끝이 아니다. 원하는 과에 합격하려면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 인턴 성적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중요한 전공의 시험, 또 면접들이 기다리고 있다.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그저 열심히 묵묵하게 내 할 일을 하는 것뿐이다. 운이 좋게도 기분 좋게 시작한 이 흐름을 계속 이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