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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문의 May 19. 2023

[병원인턴] 생애 첫 휴가

방학과의 이별 후 휴가와의 새로운 만남

드디어 나에게도 기다리고 기다리던 휴가날이 찾아왔다.

'휴가'라는 단어가 주는 왠지 모를 성숙함때문에 스스로 '휴가'를 떠난다고 말하는 것이 아직은 어색하다.

직장인들에게 1년을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어준다는 그 휴가

이제 옛것이 되어버린 방학 대신 그 자리를 휴가가 차지한 것은 내가 정말 사회인이 되었음을 일깨워주었다.

학생에서 사회인으로 신분이 바뀌었다는 걸 실감하게끔 하는 것들이 꽤나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1,2위를 다투는 것이 내게는 바로 월급과 휴가였다.​​


우리 병원인턴은 상반기에 한번, 하반기에 한번 약 일주일의 휴가가 주어지는데 이런 휴가시스템이 다른 병원들과는 몇 가지 다른 점들이 있었다.

한 병원에서 1년 내내 근무하는 타 병원 인턴들은 상반기와 하반기 휴가날짜가 연초에 모두 나온다고 한다.


반면 하반기에 다른 병원으로 발령이 나는 가톨릭중앙의료원의 특성상 상반기 휴가날짜는 상반기병원에서, 하반기 병원은 하반기 병원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 병원은 휴가 갈 수 있는 달을 선택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수련교육부에서 병원과 수련과 등 여러 가지 사정을 고려해서 휴가날짜를 정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른 병원들처럼 인턴들끼리 휴가날짜를 서로 교환할 수도 없다.

이러한 점은 수련과를 인턴들끼리 서로 바꾸지 못하는 것처럼 여러 병원으로 순환근무를 해야 하는 우리 병원만의 독특한 시스템인 듯하다.


나는 5월에 휴가를 받았다.

처음 근무턴표가 나왔을 때 성형외과를 깊게 경험해보고 싶었던 나는 5월 휴가만 피했으면 좋겠다 염원하였으나, 마치 나를 시기하는 세력이 나를 방해라도 하는 것처럼 딱 5월에 휴가일정이 잡혔다.

많이 아쉬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알기에, 아쉬움을 뒤로하고 휴가의 존재를 뇌리에서 지운채 3월과 4월을 바삐 보냈다.

휴가계획을 짜기 시작할 4월 중순 무렵 처음 휴가날짜가 나왔을 때 느꼈던 아쉬움은 겨우내 내렸던 눈이 봄을 맞아 사라진 듯 온데간데 없어져있었고, 그저 휴가날짜가 빨리 왔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만이 새로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처음 서울로 상경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처음 하는 일에 적응하고, 처음 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적응하느라 스스로도 모르게 몸과 마음이 지쳐있었던 것 같다.

당직한 다음날 오프로 하루를 쉬고 다시 출근하는 게 아니라 연속으로 7일을 쉴 수 있는 시간이 너무나도 소중하게 느껴졌다.

얼추 휴가계획을 세운 뒤부터 하루하루 디데이 카운트를 새어가며 휴가날짜만 손꼽아 기다리기 시작했다.

비로소 대한민국의 평범한 직장인 한 명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아직은 휴가보다 방학과 함께한 시간이 훨씬 긴 나는, 새로 만난 애인에게서 장기연애를 했었던 전 애인의 흔적을 무심코 찾는 사람처럼 방학과 휴가의 차이점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우선 비용이 저렴했다. 늘 성수기였던 방학과는 달리 비수기에 속하는 5월에 가는 여행은 예상했던 금액보다 훨씬 저렴했다. 여행을 계획하며 많지 않은 인턴 월급으로 휴가를 보내기에는 5월은 꽤나 좋은 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사람들과 휴가일정을 맞추기가 힘들다는 것도 큰 차이점이었다.

학교에 다녔을 때는 친구들과 스케줄이 똑같으니까 공부도, 놀러 가는 것도 다 같이 했었지만 취업을 하고 나니 더 이상은 그럴 수가 없었다.

한 달에 8번씩 있는 오프조차 맞추기조차 쉽지 않은데 일 년에 두 번 있는 휴가날짜를 맞추는 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대학생 시절 방학마다 여행을 함께 다녔던 친구들과 앞으로 여행을 가기 쉽지 않게 되었다.

각자 가정이 생기고 아이가 생기면 더더욱 어려워지겠지.

학생시절 '지금 아니면 언제 같이 놀러 다니겠냐' 하며 있는 돈 없는 돈 긁어모아가며 함께 여행 다니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또 휴가를 맞이하는 마음가짐이 달랐다.
1년에 4개월 정도 있는 방학이 있었을 때는 지금 여행을 못 간다면 다음방학 때 가면 되지 내지는 내년에 가면 되지 라며 방학을 그리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일 년에 단 2주일의 휴가만 있는 지금은 휴가 한번 한 번이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진다.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몰랐다.
연인사이에 흔히 쓰이는 이 말이, 나와 방학의 관계에서도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방학과 헤어지고 휴가와 새로운 만남을 시작했으니, 지난 관계에서 배운 점들을 잊지 않고 좋은 관계 유지하 기하려 노력할 것이다.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여행지에서 만큼은 나를 정의하는 여러 수식어들을 벗어던지고 그저 관광객 1로 머물 수 있는 게 좋다.
새로운 것들을 보고 새로운 음식들을 먹어보고 새로운 문화를 경험하는 것이 좋다.
머릿속에 고여있는 생각들을 덜어내고 새로운 생각과 경험들로 물갈이를 해주는 것이 나에게 딱 맞는 휴가이다.
일주일이라는 짧은 휴가기간에 적합한 여행지를 물색하다 끝내 괌으로 정했다.
4시간 30분이라는 적당한 비행시간, 깔끔한 관광지, 천혜의 자연경관까지
괌에 대해 찾아보면 찾아볼수록 괜히 신혼여행과 가족여행의 족보라고 불리는 곳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괌에서 보냈던 4박 5일의 휴가는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좋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과 끝이 보이지 않는 푸르른 태평양을 바라보며 에매랄드 빛의 투몬비치에서 패들보트와 카약을 탔다.
시원한 열대과일 음료수를 마시며 커다란 파라솔아래에서 챙겨간 책도 읽고, 뜨근하게 달궈진 모래에서 올라오는 열기를 자장가 삼아 낮잠을 잤다.
무지개는 또 얼마나 자주생기던지 산등성이에 생겼다가 바다 위에 생겼다가 하며 아름다운 일곱 가지 빛으로 깊은 곳에 숨어있던 동심을 불러일으켰다.​
물놀이를 하고 난 뒤 에어컨을 빵빵하게 킨 호텔침대에서 낮잠을 자고, 일어나면 피트니트센터에서 운동을 했다.


수십 가지 메뉴가 준비된 뷔페를 먹으며 하루를 시작했고, 랍스터가 가득한 뷔페를 즐기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수영장과 바다의 경계가 모호한 인피티니풀에서 빨갛게 하늘을 불태우는 노을을 바라보며 듣는 바람소리는 아직도 내 귓가에 생생하게 들린다.
깜깜한 하늘에 말 그대로 쏟아지는 별을 보며 잔잔하게 별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빛을 배경 삼아 사진을 찍었던 별빛투어
칠흑 같은 바다와 신나는 노래, 한잔의 맥주가 있던 괌의 밤
이번 휴가에서 가져가는 소중한 많은 기억들을 뇌리에 깊이 박아두어 오랫동안 잊지 않을 것이다.

첫 휴가로 떠나는 여행지는 동기들 모두가 달랐지만, 모두 어디론가 떠나고자 하는 마음이 강했다.
어떤 동기는 제주도로 향했고, 어떤 동기는 병원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절로 템플스테이를 떠났다.
혹은 일상생활에서 떠나 에너지를 충전하기 위해서 방에 콕 박혀서 여유를 즐기기도 했다.
나는 휴가를 보내는 방식이 그 사람을 설명해 준다고 생각한다.
일 년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 수 있는 그 며칠 안 되는 시간만큼은 본인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괌이나 몰디브 같은 휴양지에서 해양스포츠를 즐기고, 석양을 바라보며 맥주 한잔을 비우고, 밤에는 음악이 빵빵한 바에서 칵테일을 마시는 것
집안에서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놓고 배달음식을 시켜 먹으며 꼭 보고 싶었던 영화시리즈를 몰아서 보거나, 만화책을 보거나 또는 알람을 꺼두고 하루종일 잠을 자는 것
모두 다 멋지게 휴가를 보내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해외여행의 역치가 낮아지고, SNS와 미디어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해외여행을 떠나고 있다.
인스타그램, 블로그, 유튜브, TV 등 어디에서나 여행지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평생 간직할만한 기억을 만들고 오는 것처럼 보여준다. 기껏 해외여행을 갔는데 느린 데이터로 하루종일 카페에 앉아서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을 보거나, 한국에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거나 또는 좀 더 멋진 여행지로 여행을 떠난 친구들을 부러워하기도 한다.
또는 휴가기간 동안 집에서 머무르며 해외여행을 떠난 친구들의 SNS를 뒤적거리며 좋아요를 누르고 그들을 부러워하다가 본인의 휴가를 즐기지 못한다거나 말이다.
그렇다 보니 해외여행을 강박적으로 가거나 또는 해외여행을 가지 못했다고 해서 본인의 휴가가 보잘것없다는 생각에 빠지는 경우를 종종 보곤 한다.


본인이 행복을 느끼는 상황을 잘 알고, 그 상황으로 휴가를 즐기는 것
또 휴가지를 정했으면 그 휴가지에서 즐길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할 것
남과의 비교를 하지 말고 온전히 본인이 가진 것에 집중하는 것
글을 적기는 참 쉽지만, 글을 적는 나조차도 실천하기 정말 어려운, 이것이 바로 행복한 휴가를 보낼 수 있는 비결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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