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적부터 품어왔던 의사라는 장래희망
하루가 다르게 후덥지근해지는 날씨와 꿉꿉한 습도
작년에 왔던 여름이 죽지도 않고 또 왔음을 알려주는 6월 말
점차 해가 일찍 뜨고 늦게 지기 시작하며 낮 시간이 길어지고 있지만 요즘 나는 낮이 얼마나 길어졌는지를 전혀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브릿지, 데이 근무를 지나 나이트 근무를 서고 있는 인턴은 그저 푸르른 하늘을 바라보며 출근해서 칠흑과도 같은 새벽시간에 일하고 또다시 푸르른 하늘을 바라보며 퇴근할 뿐이다.
남들이 퇴근할 때 출근하고 출근할 때 퇴근을 하고 있는 기이한 스케줄
서울이 아닌 뉴욕의 시간대에 맞춰 살고 있는 요즘의 일상은 평상시와 꽤나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
이른 저녁을 먹은 뒤 오후 6시에 출근을 해서 일을 하다가 12시쯤 야식을 한번 먹는다.
그리고 또 일을 하다가 아침 6시에 퇴근을 한 뒤 간단한 요깃거리를 먹은 뒤 낮 2시까지 잠을 잔다.
잠에서 깨어 밥을 점심을 먹은 뒤 공부를 하던, 취미생활을 하던 2시간 정도를 적당히 보내고 나면 또다시 출근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다.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른 패턴으로 살아가는 마이웨이의 삶을 강요당하는 요즘,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내 일상을 빼앗긴듯한 느낌이 든다.
날마다 다르지만 보통 새벽 1시까지 뜨겁게 근무를 하고 나면 그 뒤에는 꽤나 잠잠해지곤 하는데,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지만 환타(환자를 타는 사람) 교수님과 함께 근무를 할 때는 새벽 1시가 아니라 새벽 4시까지도 응급실이 시끌벅적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특히 주말 응급실 새벽은 어마어마한데, 여기가 경찰서인지 응급실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주취자들과 외상환자들이 물밀듯 몰려들어온다.
이처럼 늘 시끌벅적하던 응급실도 어색할 정도로 조용해질 때가 오는데, 새벽 2시가 넘어 고요해진 진료실은 각종 공상에 빠지기에 안성맞춤인 장소로 변모한다.
정신이 또렷하지 못한 상태에서 적당히 멍을 때리고 있으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여러 생각들이 공기방울처럼 떠오른다.
'내일 아침에는 뭘 먹을까, 친구와 캠핑 가기로 한날 비가 오면 안 되는데, 내년에도 내가 이 병원에 있을까?'
순서도 형식도 없는 생각들이 마구잡이로 떠오르다가 문득 내가 왜 의사가 되고 싶어 했더라?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루살이처럼 오늘만을 바라보고 살던 삶에 갑자기 떠오른 의문
나는 왜 의사가 되고 싶어 했었지?
저 머리 너머로 흘러버릴 수 있었지만 이번 기회에 다시 한번 떠올려보기로 했다.
내가 기억하는 나의 첫 번째 장래희망은 '소방관' 이었다.
왜 소방관이 되고 싶었었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다.
화재 상황을 직접 겪었던 것도 아니고, 진화 장면을 눈으로 본 것도 아니었으며, 소방관이나 응급구조사분들께 직접적인 도움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유추해보건대 그저 불의 정열적인 빨간색에 이끌렸던 게 아닐까?
생각해 보니 나의 어렸을 적 로망이었던 벡터맨 타이거도 빨간색이었구나
아니면 불장난을 좋아했던 어렸을 적의 호기심이 그대로 반영되었을지도 모른다.
불장난하면 밤에 오줌 싼다는 말을 귀에 박히도록 들었지만, 불장난 한 번에 오줌 한 번이면 싸게 먹힌다고 생각하며 불장난을 하곤 했던 어린 시절
까맣게 칠한 도화지에 돋보기로 불을 붙이고, 생일 케이크에 딸려오는 성냥은 무조건 끝까지 태워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가 나였다.
초등학교에서 장래희망 그리기 시간에, 커다란 불을 그렸던 기억이 있는 걸로 미루어보아 소방관이 되고 싶었던 마음은 아마 초등학교 저학년까지 계속되었던 것 같다.
그 후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나의 장래희망은 의사로 변했다.
미루어 짐작해보건데 의사가 되고싶다는 생각을 했던 건 엄마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내 동생이 태어난 이후로 류마티스관절염을 앓게 된 우리 엄마는 20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어연 20년이 훌쩍 넘는 세월 동안 주기적으로 병원에 다니고 계신다.
어렸던 나를 집에 혼자 둘 수 없었던 엄마는 불빛이 번쩍이는 신발을 신고 좋아라 뛰어다니던 내 손을 잡고 병원에 다니곤 했다.
그 당시만 해도 시골에는 류마티스 관절염을 볼 수 있는 내과가 없었던 터라 가장 가까운 대학병원이었던 천안 순천향대학교 병원을 가거나, 왕복 몇 시간씩 걸리는 수원에 있는 내과 의원을 다녔었다.
엄마는 나에게 몇 시간씩 걸리는 그 긴 거리를 가면서 투정 부리지 말라며 손에 풍선이 자주 쥐어주셨는데 병원에 가는 날이면 풍선을 받을 수 있어서 좋아했었던 그때의 감정이 아직까지도 느껴진다.
그렇게 병원을 다니면서 '우리 아들이 나중에 엄마 치료해 주면 좋겠다'라고 말을 많이 들었고, 또 어린 마음에 내가 엄마를 치료해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며, 그렇게 시나브로 나의 장래희망은 소방관에서 의사로 변해갔다.
본격적으로 의사가 되고 싶다고 고등학생 무렵이었다.
사실 중학생 때까지는 본인의 생각이 뚜렷하기보다는 주변의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는 나이 아닌가
또 미래를 생각하기보다는 지금 당장 놀고 싶은 마음이 훨씬 클 때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나는 중학생 시절 게임을 너무너무 좋아했다.
게임중독이 분명했던 나의 중학교 시절, 나의 머릿속은 늘 메이플스토리, 던전앤 파이터, 서든어택 등등 여러 가지 게임으로 가득 차있었다.
아침에 학교 가기 전 2시간씩 일찍 일어나 게임을 하고 학교에 갔고, 하교를 하면 PC방으로 달려갔다.
하나에 정신이 팔리면 다른 것들에는 신경을 잘 못쓰는 나는 당시 게임에 미쳐있었다.
누가 장래희망을 물으면 지금껏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처럼 '의사가 되고 싶어요'라고 대답하긴 했으나 진심으로 의사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아니 나중에 뭐가 되고 싶다는 생각보다 당장 게임 5분을 더하고 싶은 생각만이 가득했었다.
그렇게 게임에 푹 빠져살았던 중학생 시절을 지나 고등학생이 되자 나도 머리가 굵어졌는지 생각이란 걸 하기 시작했다.
정말 원 없이 하고 싶을 만큼 게임을 해버려서 고등학교에 올라가자마자 게임에 대한 관심이 신기할 정도로 끊겼다.
고등학교 1학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게임에 쏟았던 시간을 다 합쳐도 중학교 1학년 때 게임을 했던 시간의 절반에 채 못 미칠 것이라 확신한다.
게임 캐릭터를 나보다 소중하게 생각했었던 철없던 시절은 가고 본격적으로 나의 미래에 대해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 학생에게 관심이 많았던 담임선생님께서는 학생 한 명 한 명을 불러내어 장래희망을 묻고, 그 꿈을 이루려면 어느 정도의 성적을 받아야 하는지 상담을 해주셨다.
당연히 그때도 의사가 나의 장래희망이라고 말했었고, 이제 그 당시 담임선생님의 팩트로 무장된 상담을 통해 현실을 깨달아버렸다.
의사가 되는 길은 너무너무 멀고도 험난했다.
그저 공부를 잘해야 의사가 될 수 있다고 주위에서 들었으나 구체적으로 얼마큼 잘해야 의사가 될 수 있는지는 몰랐다.
그냥 반 1등 하면 의사 될 수 있는 거 아닌가? 하고 막연하게 생각했었지만 그냥 반 1등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서는 운이 좋으면 2년에 한두 명 의대에 진학하던 지방 일반고였다.
그런 작은 학교에서 대한민국에서 가장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만 갈 수 있다는 의대에 도전하는 것이 바늘구멍에 낙타를 집어넣는 것만 같았다.
현실을 알고 나자 무언가 불타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경쟁을 좋아하는 성격이었고, 힘들어 보이는 목표에 도전하는 걸 즐기는 사람이었다.
다른 이유들은 모두 차치하고서, 시골 놈도 도시 놈들 못지않게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고, 그것을 계기로 의과대학에 가고 싶었던 마음이 더욱 굳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내 성향이 의사가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을 좋아했다.
어려서부터 내가 공부한 것, 내가 이룬 것들로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거나 가르쳐 주는 걸 상당히 좋아했다.
내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얻어낸 걸 깎고 다듬어서 상대방에게 도움을 주는 걸 좋아했고, 상대방이 나로 인해 긍정적인 영향을 받는 것에 쾌감을 느꼈다.
그러한 연유로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선생님과 의사 중 어떤 직업을 갖는 게 좋을까 진지하게 고민했던 적도 있다.
한창 미래에 대한 고민으로 골치를 싸매며 친구들과 이야기하던 중 옆에 있던 한 친구가 가볍게 '그럼 의사 선생님을 해'라는 말을 했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종이 울렸다.
'그러네? 의사 선생님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지'
그러면 말 그대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의사 선생님'이 되어야겠다.
친구의 핵심을 꿰뚫는 한마디가 고민을 말끔하게 씻어주었고 이 또한 꿈을 확고하게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마지막으로는 의사라는 직업이 내가 추구하는 '멋'에 부합했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만의 멋을 추구하고, 본인이 생각하는 멋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평생을 노력한다.
'멋'이라는 건 기준이 없는 주관적인 영역으로, 나에게 멋은 '대체할 수 없는 능력' 이었다.
나에게는 오랜 시간 동안 갈고닦은 작은 기술 하나가 수억 원짜리 자동차보다도 멋있어 보인다.
그 기술이 계란 프라이를 맛있게 하는 법 이라던가, 라면을 맛있게 끓인다던가처럼 작은 것이어도 상관이 없었다.
쉽게 쟁취할 수 없으면서, 사람들이 그 능력을 가진 사람을 필요로 하고, 그 사람을 대체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
우리나라에서, 혹은 우리나라를 넘어 그 이상으로 영향력을 주는, 대체하기 힘든 사람이 되는 방법 중 하나가 '의사'로써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허나 현실의 벽은 높디높았다.
두 번의 고배를 마시고 나서야 원했던 의대에 들어갔고, 그로부터 6년이 흘러 의사가 되고 싶다는 목표를 이루었다.
신입 의사가 되어 이병도 저 병동 열심히 굴러가며 좋은 의사가 되기 위한 수련을 한지 어엿 4개월 차가 되었으며 매 순간 매 순간 부족함을 느끼고, 공부하고 노력해야 할 것들이 눈에 보인다.
똑똑하기만 해서 좋은 의사가 될 수 없고, 환자와의 관계가 좋기만 해서 좋은 의사가 될 수 없다.
좋은 의사란 실력과 인성의 적절한 균형이 이루어져야 가능한 (물론 그중 하나가 압도적으로 뛰어나다면 혹시 모를까만) 그런 의사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되고 싶은 모습, 즉 내가 생각하기에 멋있는 모습은 시간이 지나면서 바뀌기도 하고, 점차 그 모습이 구체화되기도 한다.
지금의 내 목표는 올해 '대체하기 힘든 인턴'이 되는 것이다. 열심히 노력하고 있지만 그 결과가 어떨지는 감도 안 잡힌다. 그저 노력 끝에 주어지는 결과는 받아들일 뿐
대체하기 힘든 인턴을 시작으로 대체하기 힘든 전공의, 대체하기 힘든 전문의로의 길을 꾸준히 걸어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