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홍보책자에 내실린 내 얼굴
식을 줄 모르던 여름의 열기가 한풀 꺾이고, 시원한 바람이 살랑거리는 11월 초
의대생들을 가슴 떨리게 하던 국가고시 실기시험도 얼추 정리되어간다.
곧 의사면허를 취득할 본과 4학년 학생들
열정 가득하고 순수한 이 예비의사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병원들이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까?
병원을 원활하게 운영하기 위해선 인턴이 반드시 필요하다.
내 입으로 말하면서도 조금 슬프지만, 인턴이 아니라면 이 세상 그 누가 잠도 안자가며 오랜 시간 저임금을 받아 가며 일을 하려고 할까
레지던트가 되기 위해, 또 좋은 인턴 점수를 받기 위해 마음속으로 참을 인 자를 수도 없이 새기며 묵묵히 일하는 우리 인턴들
일하는 우리들은 자각하기 어렵만 우리의 존재는 병원에 필수불가결하다.
인턴이 필요한 모든 병원들이 충분히 인턴을 모집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이건 마치 1인분의 고기로 3명이 배부르게 먹고 싶다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인턴은 1개의 병원에 단 1번만 지원할 수 있다.
만약 불합격한다면 후기 병원 지원을 할 수도 있으나 후기 병원의 경쟁률은 더더욱 높다.
무섭고도 잔인한 시스템
의사가 되기까지 수많은 경쟁을 겪어왔던 우리들은 인턴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또다시 경쟁 속으로 몸을 던져야 한다.
졸업 후 곧바로 인턴 수련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줄어드는 것 역시 병원들의 인턴 수급을 어렵게 한다.
군 복무를 해결하는 방식, USMLE (미국 의사시험) 및 JMLE (일본 의사시험) 응시자 수 증가, 일반의 비율의 증가, 의사 면허를 이용한 비임상 분야로의 진로 선택 등등의대를 졸업하고 인턴 수련을 받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했던 옛날과는 달리 세대가 교체되며, 그리고 사회가 변화되며 예비의사들 그리고 새내기 의사들은 기존의 '상식'에 반하는 여러 선택들을 하고 있다.
서울 경기 대구 부산 대전 ...
대한민국 수많은 도시에 위치한 수많은 병원들의 발등에 불똥이 떨어졌다.
프로듀스 101 참가자들이 픽미픽미 픽미업을 부르듯 우리 인턴들의 마음을 픽 하기 위한 병원들의 매력 어필을 보는 건 꽤나 흥미롭다.
이때 즈음 전국 의과대학 국가고시 준비실에는 각 병원들에서 보낸 수십 장의 인턴 모집 홍보 팜플렛이 쌓이는데, 공부하기 싫을 때 한 번씩 보면 시간가는줄 모르고 빠져든다.
적극적인 병원들은 팜플렛 배포에 만족하지 않는다.
수련교육부에서 직접 발로 뛰며 병원을 홍보를 하는데, 이것 또한 공부하기 싫은 우리들에게는 재미있는 이벤트이다.
오늘은 A 병원, 내일은 B 병원
모두가 하나같이 인턴 수련을 위한 최고의 환경을 마련해 주겠다 약속한다.
나를 원하는 병원이 이렇게 많다고?
내가 이 정도로 괜찮은 사람인가?
시험에 파묻혀살던 의대생들에게 이런 관심과 대우는 그들의 어깨를 끝도 없이 올라가게 만든다.
그뿐이랴, 본과 3-4학년, 빠르면 본과 1-2학년까지도 참여할 수 있는 서브인턴 제도를 운영하는 병원들은 더하다.
전국에 있는 잠재력 있는 의대생들을 모으고 직접 프로그램을 통해 인재를 기르며 병원을 홍보하는데, 2주 동안 병원에서 자고 먹고 배우면 자연스레 이 병원에 오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다.
본과 3학년 시절 서브인턴으로 참여했었던 서울삼성병원은 한창 국가고시 필기시험을 준비하고 있을 12월에 서브인턴에 참여했던 모든 학생들에게 정성 가득한 간식을 보내는 지극한 정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인턴 수급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이기에 이렇게까지 인턴 모집에 진심을 다하는 걸까?
병원의 일은 환자의 생명과 직결된 일이다. 일이 많다고 설렁설렁할 수도 없는 일이고, 다음날로 미룰 수도 없다.
그렇다고 일의 양이 적은 것도 아니니 함께 일하는 사람이 몇 명인지가 정말 중요한 요소이다.
일의 양은 똑같은데 그 일을 10명이 하는것과 20명이 하는것은 천지차이니까
인턴의 수가 적은 병원은 인턴 한 명 한 명에게 주어지는 업무가 상대적으로 많아질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그렇게 구멍이 뚫리는 병원들은 앞으로도 악순환이 될 가능성이 높다.
비슷한 월급을 받고 1년을 일하는데, 가능하면 적게 일하고 싶은 게 어쩔 수 없는 마음이니까
우리 의료원은 매년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밀물과 썰물처럼 들어오고 빠지는 거대 집단이다.
매년 100명 정도 졸업하는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학생들은 다 합쳐도 필요한 인턴의 절반이 채 되지 않는다.
그러니 필연적으로 다른 학교 졸업생들이 100명 가까이 병원에 들어와야 병원이 한 해 동안 잘 운영될 수 있기에 우리 의료원은 병원 홍보에 진심을 다한다.
우리 의료원 홍보팀은 6월이 되면 슬슬 시동을 걸기 시작하고 전국에 퍼져있는 8개 병원을 다니며 홍보영상을 촬영한다.
매년 제작하는 팜플렛에 넣을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촬영하는데 이런 홍보물에 등장하는 모델들은 다름 아닌 병원에서 근무하는 인턴과 레지던트
실제로 근무하고 있는 인턴과 레지던트가 후배들에게 병원의 좋은 점을 직접 이야기해주는 컨셉인데 내 경험을 미루어보면 정말 괜찮은 컨셉이다.
나도 병원을 선택할 때 먼저 경험한 선배들의 조언이 제일 크게 작용했다.
시간이 흘러 후배들에게 조언을 줄 수 있는 입장이 된 지금 다시 생각해 보아도 병원을 선택하는 데에 고려해 볼 정보들 중 인턴의 경험담을 뛰어넘는 건 없다고 생각한다.
홍보 모델을 선정하는 법은 병원마다 다르다.
어느 병원들은 홍보모델 지원자가 많아서 면접까지 보며 경쟁해야 한다고도 들었다.
그러나 우리 병원은 인턴 수가 적어도 너무 적은 병원이었다.
경쟁은커녕 근무시간에 촬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있는 인턴이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
그래서 홍보 촬영 시간에 근무를 하지 않거나, 근무 과에서 촬영을 허락해 준 인턴들을 위주로 선발을 했다고 알고 있다.
촬영할 당시 나는 응급실 나이트 근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후 시간이 비는 상황이었고 홍보 촬영을 해줄 수 있냐는 연락을 받았다.
짧은 고민 끝에 이 또한 재미있는 경험이 될 것 같아 흔쾌히 수락했다.
촬영 날 당일 06시까지 응급실의 밤을 지키고 누가 업어가도 모를 만큼 깊은 잠을 잤다
눈을 떠보니 이미 해는 중천이요, 촬영까지 한 시간이 남지 않은 상황
평소 같았으면 여유롭게 커피 한잔하고 있을 시간에 나는 헐레벌떡 병원으로 뛰어갔다.
촬영장에는 먹을 것들이 한가득이었다.
샌드위치부터 해서 견과류, 커피, 각종 과자 등등
13시부터 시작하는 빡빡한 일정
점심 먹을 시간도 없을 우리 인턴들을 위한 수련교육부의 배려였다.
동기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배를 채우고 있을 무렵 커다란 스튜디오 용 카메라와 장비들을 짊어메신 선생님들이 방안으로 들어오셨다.
촬영에 앞서 촬영감독님이 이것저것 설명을 해주셨다.
8개 병원을 돌아다니며 촬영하느라 사진을 많이 찍겠지만, 홍보책자가 몇 페이지 안되기 때문에 실제로는 사진이 안 들어갈 수도 있다
그래서 혹여나 사진이 안 들어간다 해도 섭섭해하지 말라고 말이다.
이런 말을 해주셨어도 기껏 3-4시간 열심히 촬영했는데 결과물에 내 사진이 하나도 안 들어간다면 당연히 아쉬움이 남을 것 같았다.그렇지만 또 안 들어갔을 경우 내 얼굴이 문제가 아니라는 변명의 여지가 생긴 것 같아서 다행이라는 생각 역시 들었다.
오늘 촬영 모델은 인턴 5명, 레지던트 선생님 2명
앉아서도 찍고 서서도 찍고 턱을 괴고 찍고 등을 돌리고 찍고
수십 가지 포즈로 수십 장의 사진을 찍었다.
촬영감독님께서는 포즈는 다양하지만 표정은 늘 웃을 것을 주문하시는 바람에 쥐가 날 정도로 입꼬리를 바들거리며 올렸다.
문득 옛날에 보았던 광고 모델의 촬영 현장 동영상이 떠올랐다.
1초에 한 번씩 포즈를 바꿔가며 몇 시간씩 촬영을 하던 그분의 얼굴근육은 내 것의 수십 배 혹은 그 이상으로 단련되었을 거라 확신한다.
촬영을 진행하는 중간중간 인터뷰도 했다.
CMC에 왜 지원하게 되었는지
CMC에서 의료혜택을 본적이 있는지
CMC 수련교육부가 고마웠던 적이 있는지
사전 연락 없이 갑자기 맞닥뜨린 인터뷰라 동영상을 찍는다고 했을 때 꽤나 당황했다.
분명 사진만 찍는다고 했었는데..
아무런 준비도 안 되어 있었지만 사실은 준비한 척 능청스럽게 대답을 했었다.
내 대답이 나쁘지 않았는지, 감독님께서는 앞으로 만들어질 홍보 동영상에 내 인터뷰를 꼭 넣어주겠다고 약속까지 해주셨다.
실내 촬영에 이어 야외에서도 촬영했다.
우리 병원에 이런 공간이 있다는 걸 촬영을 하며 처음 알게 되었다.
코로나19때문에 작년까지 폐쇄된 공간이었다고 했는데 다시 올해부터 열었단다.
비록 장마철이라 날씨는 흐렸지만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촬영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환기가 되었다.
야외촬영의 핵심은 자연스러움이라며 아무 말이나 하며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해달라는 감독님의 주문
나중에 찍은 사진을 보니 진지한 의학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나왔지만 사실은 눈앞에 날아다니는 러브 버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또 수련교육부장님께서 최근에 한 회식에서 우리가 너무 잘 먹어 생각보다 돈이 너무 많이 나왔다는 이야기도 하시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주셨다.
하하 웃으며 식은땀을 흘렸다.
그때 시킨 고기 중 거의 절반을 내가 먹었던 거 같은데..
교수님 그때 젊어서는 많이 먹는 거라고 원 없이 시키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촬영은 다양한 장소에서 진행되었다.
환자분들이 없는 병실에서도 찍고, 병원 로비에서도 찍고 성모마리아 석상 앞에서도 찍고..
병원에서 찍을만한 곳이란 곳은 죄다 찾아다니며 촬영을 하는 바람에 우리 병원의 구조에 대서 훤히 꿰게 되었다.
그렇게 재미있는 경험을 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촬영을 하며 들떴던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에는 하루가 채 걸리지 않았다.
또다시 시작된 바쁜 일상에 촬영을 했던 사실을 까맣게 잊고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숙소에 못 보던 얇은 책들이 놓여있는 걸 보았다.
2024년 새로운 전공의 모집요강
이전에 촬영했던 결과물이 몇 달을 걸쳐 드디어 완성되었다.
보자마자 '과연 내 사진이 실렸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렘 반 긴장 반 두근거리며 열어본 팜플렛에는 다행히도 매일 아침 거울에서 보던 얼굴을 군데 군데에서 볼 수 있었다.
사진을 보고 있으니 비록 몇 달이 지났지만 그 사진을 찍는 순간의 현장 분위기, 나누었던 대화들이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렇게 추억에 곱씹고 있는데 유튜브에 인터뷰 영상이 올라왔으니 확인해 보라는 연락이 왔다.
당직실에 있는 동기들과 30분짜리 홍보영상을 같이보며, 다른병원에서는 촬영을 이렇게 했구나, 다른병원에는 이런분들이 계시는구나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재미있게 영상을 보던중, 갑자기 툭 하고 내 얼굴이 모니터에 나왔다.
영상에 내 인터뷰를 넣어주시겠다던 감독님의 말씀이 빈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동기들은 지금과는 다른 내 이전 머리 스타일에 놀랐고 나는 내 목소리, 표정, 말투에 놀랐다.
이게 나라고? 내가 듣는 내 목소리가 아니고 내가 거울로 보는 내 얼굴이 아닌 거 같았다
친구들에게, 부모님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더니 친구들은 놀리기에 바쁘고 부모님은 자랑스러워하셨다.
특히 엄마는 이 영상을 몇 번이고 계속 돌려보셨다고
아들이 서울에서도 기죽지 않고 잘 지내는 모습이 퍽 자랑스러우신가 보다.
살면서 이렇게 재미있는 경험을 해보기도 하는구나
서울에서 그리고 가톨릭 중앙 의료원에서 인턴을 하기 참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