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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문의 Dec 18. 2023

[병원인턴] 다사다난, 전공의 시험의 끝

인턴의 끝이 보이기 시작하는 12월

2023년 12월 17일 일요일

오랜 시간 동안 기다려왔던 결전의 날이 드디어 밝아왔다.

냄새 먹는 하마가 옷장 속 냄새를 남김없이 빨아들이듯 나의 쉬는 시간 그리고 체력을 있는 대로 앗아가던 전공의 시험

하반기 병원에서 근무를 시작하면서부터 낮이나 밤이나 당직이나 오프이나 시험이라는 돌덩이가 늘 마음을 둔중하게 짓누르고 있었다.

일이 많은 날이면 바빠서 공부를 못했고, 여유로운 날이면 이전에 못했던 공부를 하느라 바빴다.

일 중간중간 생기는 짧은 틈을 이용해서 어떻게든 한 문제라도 더 보려고 했던 모습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한 시간이라도 공부하겠다고 스터디 카페로 터덜터덜 발길을 옮기던 모습

일주일에 하루 있는 오프, 본가에 가면 너무 편하게 쉬게 될까 본가 대신 자취방에서 주말을 보내는 모습

게임으로 설명하자면 지속적으로 독 데미지가 들어오는 바람에 체력 보충도 안되고 그저 시들시들한 채 돌아다니게 되는 그런 상태

바로 그런 모습으로 지난 세 달을 치열하게 보냈던 나와 우리 인턴 동기들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시험 며칠전 간단하게 자리한 회식


여느 때처럼 아침 5시 30분에 눈을 뜨고 병원 근처에 위치한 스터디 카페로 향했다.

인턴을 시작한 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맞춰져버린 나의 생체시계

출근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일찍 일어나 버릇 하다 보니 출근시간이 몇 시이든지, 평일이든 주말이든 관계없이 늘 5시에서 5시 30분 사이에는 눈이 떠지게 되어버렸다.

처음에야 꿀맛 같은 새벽잠을 조금이라도 더 누려보고자 억지로라도 눈을 감고 있었는데, 그렇게 눈을 감고 있는다고 있는 피로가 없어지지는 않는다는 슬픈 사실을 깨달아 버린 이후로는 눈이 떠지면 그냥 이불을 털고 일어난다.

그럴 바에 커피를 한잔 마시며 여유로이 하루를 준비하는 습관이 생겨버렸는데 이 작은 습관이 내가 꽤나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고 느끼게 해주고 있다.  



스터디 카페에서 최근 선물 받은 모과돌배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마음을 정리했다.

이번 시험을 열심히 준비했지만 마음에 쏙 들 만큼 만족스러운 정도로 공부를 하지는 못했었다.

하루 종일 공부할 수 있는 스케줄도 아니고, 월급을 받고 일을 하는 만큼 공부보다는 늘 일이 우선이 되었다.

또 원체 공부라는 게 끝이 없지 않은가

하면 할수록 나의 부족한 면이 크게 보이고 그만큼 해야 할 공부가 점차 많아지기 마련이다

그러니 애초에 만족스러울 만큼 공부를 한다는 말이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러니 나는 그저 주어진 환경에서 열심히 했고, 시간을 되돌리고 싶지 않다는데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사실 나는 빨리 오늘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마치 선물을 받고 싶어서 크리스마스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어렸을 때처럼

그 기다림의 연유가 '어떤 문제가 나오든 다 부숴버리겠어' 하는 자신감이었으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그런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압박에 눌린 이런 생활을 털어버리고 싶었다.

퇴근 후에 영화도 보고, 운동도 하고, 오프인 날에는 저 멀리 여행도 다녔던 잃어버린 나의 일상을 하루빨리 되찾고 싶었다.



혼자만의 시간으로 마음을 단단하게 다진 후, 아침 일찍 동기들과 함께 대전역으로 향하며, 올해부터는 바뀐 패드를 이용한 시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른 분야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의대에서만큼은 시대가 변하면서 점차 종이와 컴퓨터용 사인펜이 사라지고 있다.

내가 졸업했던 학교에서는 본과에 올라가면서부터 모든 시험을 패드로 보았었다.

학교 시험은 패드, 전국에서 동시에 보는 임종평같은 시험은 컴퓨터

그 덕분에 나는 패드로 시험을 보는 것에 전혀 거부감이 없는 상태였고, 수련교육부에서 몇 달 전에 보내준 공지와 패드 시험 설명서를 보며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인 것을 확인한 뒤 마음을 편안하게 가졌다.



대전역에 도착하니 기차 출발까지 30분 정도 남았다.

허기도 지겠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피곤도 하겠다

마침 열어있는 크로플가게에 들어가 조촐한 브런치를 먹었다.

갓 구워진 크로플을 베어 물고 따뜻한 커피를 홀짝이며 올해 치렀던 여러 시험들에 관해 동기들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오늘만큼은 인턴이 아닌 수험생의 신분임을 다시 한번 체감했다.

콜이 와있진 않을까, 언제 콜이 올까 생각날 때마다 주기적으로 휴대폰을 확인해야만 했던 불편한 마음

오늘 하루만큼은 그 불편함을 벗어던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했다.


대전역에서의 여유로운 아침

대전역으로 삼삼오오 모인 반가운 얼굴들과 함께 수서로 향하는 SRT에 몸을 실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눈보라가 휘날리던 바깥세상과는 달리 따뜻하고 포근하게 반겨주던 기차

배도 부르고 등도 따숩고, 어김없이 찾아오는 잠과의 사투를 벌이며 올해 치렀던 임종평, 작년에 치렀던 전공의 시험 기출문제들을 가볍게 훑어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공부하던 중 문득 느껴진 쎄한느낌에 고개를 휴대폰을 확인해 보았다.

8시 15분, 잠실 도착 예상시간은 8시 10분이었다

그러나 우리를 싣고 있던 기차는 잠실은커녕 동탄에서 멈춰있었다.

계속 반복해서 들려왔지만 문제를 보느라 귀담아듣지 않던 안내방송에 귀를 기울여보니 기차의 결함으로 도착시간이 지연된다는 내용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불안한 마음에 동탄에서 잠실까지 택시로 얼마나 걸리는지 찾아보았다.

길이 하나도 안 막힌다는 가정 하에 대략 50분

나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직원분들에게 향했다.

기차가 언제쯤 다시 출발할 수 있냐는 나의 질문에, 직원들은 '정확하게 모르지만 곧 다시 출발할 수 있을 거다'라고 답했다.

직감적으로 느꼈다. 아 이거 망했다.

"금방 갈게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드레싱을 재촉하는 환자와 보호자들에게 너무 바빠서 당장 못해드릴 때 늘 내가 하던 이야기 아닌가

이대로 기차가 고쳐질 때까지 기다리고만 있다가는 시험 못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고 함께 타고 있던 동기들을 하나둘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야 우리 내려야 돼, 안 내리면 시험 못 봐. 지금 택시 타고 서울 가야 돼"

그렇게 굳게 닫혀있던 기차문을 열고 예상에도 없던 동탄에서 하차를 하고만 우리 인턴들

차가운 눈발을 맞으며 지나가는 택시들을 어떻게든 잡으려 고군분투를 한끝에 간신히 서울로 향하는 택시를 탈수 있었다.


동탄에 갇혀버린 불쌍한 인턴들

시험 장소까지 예상 도착시간은 9시 20분, 입실 마무리 시간은 9시 30분

일찍이 도착해서 느긋하게 즐기는 커피 한 잔, 여유롭게 훑어보는 공부정리본

나의 계획은 무참히도 산산이 박살이 나버렸다.

나의, 아니 우리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만이 가득 찼다

그저 제시간에 도착해서 시험만 볼 수 있기를

진담 반 농담반으로 던진 한마디

"시험 못 보면 우리 군대 가는 거지..? "

순간 등줄기가 오싹해지며 식은땀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혔다.

할 수 있는 만큼 다 해보고 군대를 가는 건 어쩔 수야 없다지만 이렇게는 안된다.

당장 내년에 논산에서 군대리아를 먹게 되더라도 이렇게 억울하게는 안된다.



가톨릭 병원에서 근무하는 우리를 하느님께서 불쌍히 여기셨는지, 일요일 아침 8시 잠실로 향하는 고속도로는 시원하게 뚫려 있었다.

덕분에 한 번도 막히지 않고 뻥 뚫린 도로 위를 질주할 수 있었고 '평일 같았으면 절대로 도착 못했어요'라는 기사님의 말과 함께 9시 20분까지 늦지 않고 시험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환호성을 외치며 후다닥 배정된 교실로 달려갔고 마음이 급한 나머지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열자, 어색할 정도로 차분한 교실 속에서 단 한자리를 제외하고 모두가 앉아서 공부하고 있었다.

수험번호와 좌석을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내 자리는 눈 감고도 알아볼 수 있었다. 빈자리가 내 자리다

설마 지금 온 거야?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 틀림없는 감독관님의 눈빛을 멋쩍게 흘리며 터벅터벅 자리로 가서 앉았다.


가까스로 도착한 시험장


안도의 한숨을 돌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바로 옆에 상반기에 근무했던 병원 룸메이트가 앉아있었다.

무척이나 반가웠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서로 시험 반가운 마음을 뒤로한 채 가볍게 인사를 건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험은 시작되었다.

120분 동안 100문제를 풀어야 하는 시험

나는 자신이 있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아니다

수험생이 겪을 수 있는 최고의 액땜을 했기에, 찍은 문제 중 절반은 맞출 수 있겠다는 근거 없는 믿음

바로 그 믿음이 내 자신감의 근원이었다.



시험시간이 늘 그렇듯 두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고 드디어 시험이 끝났다.

여타 시험이 그렇듯이 시험의 끝은 온갖 감정으로 뒤섞인다.

후련함, 찜찜함, 불안감, 그리고 기대감

비빔밥에서 야채를 하나씩 골라 먹는 듯 갖가지 감정들을 하나씩 느껴가며 교실 밖으로 나갔다.

교실밖엔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 참 많았다

같은 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의료원으로 인턴을 온 친구들

같은 대학을 졸업했으나 다른 병원으로 인턴을 갔던 친구들

한 번 더 전공의 시험을 치르는 선배들

상반기에 같이 근무했던 인턴 동기들

하반기에 같이 근무하고 있는 인턴 동기들


반가운 얼굴들과 하나둘 인사를 하고 있자니 서울에서 그동안 많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왔고 소중한 인연들이 생겼음을 깨달았다.

반가운 얼굴들의 끝에는 오랫동안 얼굴을 보지 못했었던 가족과도 같은 상반기 인턴들이 있었다.

상반기 인턴들을 보면 오랫동안 못 보았던 가족을 보는 것 같은 감정이 든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처음 인턴을 함께 시작하고, 서로 하나부터 열까지 배우고 가르쳐 주며 함께 성장한 동기들

비록 하반기 때 몸은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엊그제 만난 것처럼 너무나도 반가웠고, 함께 점심을 먹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애정하는 상반기 인턴들

이제 시험이 끝났으니 면접만이 남았다.

그 말은 즉 이 인턴생활도 끝을 향해 가고 있다는 의미와도 같다

우당탕탕 시작했던 인턴생활, 얼마 남지 않은만큼 끝까지 집중해서 만족스럽게 매듭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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