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의 힘을 언급하는 경우는 자주 봤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만 해도 그랬고. 돈과 엮이지 않아도 문장을 강조하는 장면은 흔하다. 집 앞 도서관에도 필사하는 장소가 있었고, 서점에도 문장 필사 서적들이 종종 보인다. 문장으로 작업하는 사람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물론 필사하는 방식은 제각각이다. 실제로 필사용으로 나온 서적들과 개인적으로 필사한 기록이 있는 공책을 보면 느낌부터가 달랐다. 전자가 문장만 있다면 후자는 완전 해부에 가까웠으니까. 왜 이렇게 썼는지나 나라면 어떻게 썼을지 등등…….
이렇게까지 쓰는 이유는 간단했다. 글을 진심으로 쓰고 싶었으니까. 몇몇 사람들은 그게 어리석은 짓이라 했지만……. 그때마다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만약 이 작업이 어리석은 짓이라면 왜 서점에는 크로키나 그런 교본들이 있냐고. 이 의문에 대한 답들은 다른 책들에서도 볼 수 있었다. 조정래 작가는 『황홀한 글감옥』에서 송나라 문인 구양수의 말인 '다독, 다상량, 다작'을 인용하여 좋은 글을 쓰는 방법을 설명했고, 루트번스타인 부부는 『생각의 탄생』에서 천재들은 '무엇'을 생각하는가에서 '어떻게' 생각하는가로 갔다 말했다.
얼핏 보면 How만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이런 행동이 무의미하게 보일 수도 있고. 하지만 How는 그냥 나오지 않는다. 우리가 이를 떠올리는 때가 언제인지를 생각해 보면 이 말이 이해가 가리라. 대부분 효율적인 업무 처리나 독창적인 표현처럼 어떤 일을 할 때 아니었는가? 그렇다면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 또한 루트번스타인 부부의 『생각의 탄생』에서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 생산적인 사고는 내적 상상과 외적 경험이 일치할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는 문장에서.
구양수의 말을 통해 이 문장은 더욱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처음으로 제시한 다독은 문자 그대로 많이 읽으라는 뜻이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의문을 품을 수 있다. '무엇을, 어떻게 읽는가?' 같은 질문처럼. 우선은 첫 질문인 무엇을 읽을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무엇을 읽기 위해서는 우선 무엇이 존재해야 한다. 무엇이 없다면 우리는 그 대상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처럼 추상적인 개념들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각자의 느낌을 풀어낼 때는 존재한다고 말하기 어려우나 그에 맞는 단어와 정의는 분명 존재한다.
즉 읽는다는 행위는 이미 존재하는 대상을 읽고자 하는 대상이 대상을 외부로부터 인식한 뒤의 행동들 중 하나라는 뜻이며, 이는 루트번스타인 부부가 언급한 외적 경험들 중 하나에 속한다. 두 번째 질문인 어떻게 읽을지에 대한 답 또한 상술한 저서의 첫 장에서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저자는 생각의 과정을 정신적 요리에 빗대에 설명하는 장에서 정신적 요리가 어떻게 나오는지 설명한다. 요리 과정은 여러 생각들을 어떻게 손질하고 준비하는지나 탄생하는 과정 모두 예측이 쉽지 않다. 타인의 시선에서 볼 때면 더더욱 그렇고.
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도구가 바로 내적 상상이고 다독에 있어서는 어떻게 읽는지에 대한 답이다. 그 수많은 과정들 중 하나가 필사고. 이렇게 말하면 필사는 누구나가 다 하는 과정 아니냐는 질문이 들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 질문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문장 자체만 쓰는 과정은 누구나 다 할 수 있으나 그 이후의 과정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너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나 나라면 이 문장을 어떻게 표현했을지 등등……. 그 결과물도 그렇게 생각하면 마찬가지 아닐까. 개인이 아는 단어의 양이나 그 깊이가 다름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래서 순우리말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나 싶었다. 지금 있는 곳인 해거름마을공원인증센터도 마찬가지였고. 해와 거르다는 말의 결합으로 탄생한 단어라는데,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질 무렵이라는 뜻이란다. 마침 여행하는 경로도 반시계방향이었다. 이렇게 도는 게 더 쉽다는 말 때문에 경로를 이렇게 잡았지만……. 생각해 보면 이렇게 도는 경로도 나쁘지 않으리라. 해와 함께 떠나는 느낌이 들 테니까. 해 질 녘에 탔다면 조금 더 이 느낌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모르겠다. 또 다른 뜻인 한 일도 없이 하루가 건너뛰듯 지나갔다는 말 때문에. 아무것도 없이 떠난 여행은 과연 일이 아닐까? 이분법이었던 이 질문의 답은, 그 경계를 잊고 있기 때문이다. 어디에서 어떻게 보는지와 이후의 일들이 그 현상을 가속화시키고 있었다. 몸과 주머니가 가벼울수록 할 일들은 늘어나고, 고독하게 떠날수록 넓고 얕은 만남은 많아진다. 용두암과 해거름마을공원에서의 만남처럼. 그 만남이 얼마나 얕음까지는 알기 어렵겠지만…….
그래도 만났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일은 얼마든지 나온다. 목적이 있든 없든 간에. 용두암에서의 만남이 같이 인증센터를 가자는 목적에서 나온 여행이었다면 해거름마을공원에서의 만남은 그렇지 않았다. 정확히는 혼자와 커플의 만남일까. 그런 사람들을 볼 때면 어머니는 내심 부러워하셨다. 나도 마찬가지였고. 누군가와 같이 뭔가를 한 적은 많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저 또한 복이라 생각한 적이 많았다. 사랑하는 단어들 중 하나가 소속감이라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