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사람들은 오랫동안 고구마를 감저라고 불렀다. 감자는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하여 내륙에서 제주도에 이주해 간 사람 중에는 감자와 고구마를 헷갈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2018년 평창올림픽 때 만난 남과 북의 정치인들은 오랫동안 오징어와 낙지를 각각 반대로 불러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들은 남북이 오징어와 낙지라는 용어부터 통일해야겠다는 농담을 주고받았다.
20세기 초 중국 양쯔강 지역의 시골 마을에 관한 짧은 기록이 있다. 도시 상인이 지역 농민들의 생산물을 구매하는 과정에서 당시 시가로 구리동전(銅貨) 1,300문(文)에 해당하는 은화 1원(元)을 주려고 했는데, 농민들이 은화 대신 구리동전 1,000문을 달라고 요구했다는 내용이다.
세계 최초의 실물 은화는 기원전 6세기경 지금의 튀르키예 지역에서 발견됐다. 그런데 기원전 35세기로 추정되는 메소포타미아의 신전과 궁전 유적에서 발견된 다량의 점토판에는 성직자와 관리, 공방에서 일하는 장인이나 노동자들에게 국가가 지급해야 할 은화(銀貨)가 등장한다. 은화의 단위는 셰켈인데, 실제로 주조되지 않은 상상 속의 통화인 은화 1셰켈이 보리 1부셸과 같은 교환가치를 가지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던 것이다.
오컴의 면도날(Ockham's Razor)은 “불필요한 가정을 하지 말라”는 의미로 쓰인다. 700년 전쯤에 영국에서 태어나 청빈을 강조하는 프란체스코파 소속 수도사로 살았던 오컴은 “눈앞의 사물은 단지 우리들에 의해 이름이 부여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있는 그대로의 사물이 아니라 자신이 의미를 부여한 사물과 가설 체계를 통해 세상을 볼 수밖에 없다. 가정이 복잡해질수록 가설의 오류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게 명목주의(nominalism)의 시조인 오컴의 생각이었다.
그렇다. 이름, 혹은 가치는 인간이 부여한다. 이름의 대상들―오징어, 낙지, 감자, 은, 구리동전 등―은 인간이 규정한 의미와는 무관한 존재들이다. 가치 역시 인간의 상상 속에 존재하며 인간의 필요에 따라 달라진다. 유발 하라리도 그의 저서 ‘사피엔스’에서 그런 식으로 말했다.
기원전 3,500년경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모든 물건을 ‘셰켈’이나 ‘미나’라는 계산 단위로 거래했다. 상상된 가치 체계에서 중요한 것은 은화라는 실물적 결제 수단이 아니라 ‘셰켈’이나 ‘미나’라는 계산 단위였다. 비슷한 맥락에서 20세기 초에 기록된 양쯔강 지역 농민들에게 중요한 것은 도시에서 통용되는 은의 가치가 아니라 시골 공동체에서 유통될 수 있는 구리동전의 쓸모였다.
모여 사는 정치적 동물인 인간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상상의 질서에서 벗어나기 힘든 존재다. “국가가 만든 종이돈은 가짜고, 진짜 가치가 있는 것은 금이나 은이다”라는 생각도 부질없다. 금, 비트코인, 기축통화 역시 모두 상상의 질서 속에 있다. 이들이 가치를 가지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원하기 때문이라는 순환논리의 범주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언제, 어디서 살았느냐, 즉 지도와 달력에 따라 그 내용이나 강도가 달라질 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상상의 질서를 유익하게 활용할 수 있다. 국가의 돈에 관한 한 그렇다. 국가는 ‘지불공동체’를 만들고 계산 단위를 정할 수 있는 현실적인 힘을 가지는 존재다. 그런 국가의 힘은 과세 능력에서 나온다. 헤지펀드 투자자인 모슬러(Warren Mosler)는 다음과 같은 사례를 통해 국가의 과세 능력을 설명한다.
모슬러는 집에서 아이들에게 집안일을 도와달라고 했지만, 아무도 일을 도와주지 않았다. 그래서 모슬러는 집안일을 도와주면 자신의 명함을 주겠다고 했지만, 여전히 아무도 집안일을 돕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 쓸모도 없는 명함을 왜” 주느냐고 반문했다. 그래서 모슬러는 아이들에게 집안일을 안 해도 좋으니 대신 매달 명함 30장을 내라고, 명함을 내지 않으면 TV를 보거나 수영장을 쓰거나 쇼핑몰에 가는 권리를 누릴 수 없다고 선언했다. 모슬러가 자신의 명함으로만 낼 수 있는 ‘세금’을 부과해 명함의 쓸모를 생성하자 아이들은 침실, 주방, 정원을 정리하느라 분주해졌다.
모슬러는 아이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던 명함이 단지 납세의 수단이 됨으로써 수요가 증가하고, 명함을 얻기 위해 가사 노동력도 제공할 수 있음을 설명하였다. 이 에피소드는 명함을 국가 통화로 바꾸면 조세가 통화(단위)를 만들고 경제를 움직일 수 있음을 설명하는 논리로도 활용될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국가가 군대와 관료 조직을 창설하고 생산능력을 높일 수 있었던 것은 세금 부과와 상상 통화 덕분이었다.
오늘날 국채는 모슬러의 명함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국채는 정부의 차용증이고, 정부는 국채의 발행과 판매를 통해 궁극적으로 은행의 차용증(요구불예금)을 얻는다. 그 요구불예금을 재정지출을 위해 사용한다. 즉, 국방, 복지, 공공 인프라 건설 등을 위해 국채 판매를 통해 얻은 요구불예금을 사용한다. 그리고 가계와 기업의 은행 요구불예금 중 일부를 세금으로 걷어 자신의 차용증인 국채를 상환한다. 세금의 존재 때문에 재정지출을 할 수 있는 것은 맞는데, 세금을 걷어야만 재정지출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