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30일 한국은행-한국금융학회 정책 심포지엄에서 인사말을 하게 된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앞으로 저출생・고령화와 잠재성장률의 추세적 하락이 지속되면 선진국 중앙은행이 했던 것처럼 양적완화(Quantitative Easing) 정책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원론적인 얘기에 불과했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한국은행이 양적완화를 고려하고 있다는 우려 섞인 기사들이 등장한 것이다. 그러자 일주일 뒤 이 총재는 이탈리아의 한 호텔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양적완화는 중장기적인 차원에서 생각해 볼 과제 중 하나일 뿐이라면서 “한국은 기축통화국이 아니기 때문에 양적완화는 쉽지 않다는 게 평소의 생각”이라고 밝혔다.
섣부른 언론 기사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이 총재의 해명이었다. 도대체 기축통화와 양적완화가 무슨 관계에 있을까? 기축통화는 무역의 기준이 되는 통화라는 의미이긴 하지만, 보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어 많은 나라들이 외환보유고에 비축하는 통화라는 용어로도 사용된다. 기축통화라는 용어 선택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보유 가치가 낮은, 인기 없는 통화(예컨대, “원화” 표시 통화)를 가진 나라는 양적완화를 하기 어렵다는 이 총재의 발언에는 심각한 오해, 또는 오류가 있다. 아래 그림에는 은행예금(돈)의 발생과 그것을 촉진하는 양적완화의 개념이 나타나 있다. 가계와 기업, 정부의 부채(차용증)는 은행의 자산이 되고, 은행의 부채(은행예금)는 정부와 가계, 기업의 자산이 된다. 즉 정부의 국채와 민간 부문의 대출은 은행 장부에 은행예금이라는 기록을 낳는데, 그게 바로 (앞에서 살펴본 위르은행의 경우처럼) 은행 네트워크에서 사용되는 돈이다. 돈이라는 은행의 기록은 경제주체 간에 교환되고 변동하면서 물건과 서비스의 생산과 유통을 촉진하는 데 쓰인다.
< 은행예금(돈)의 발생과 양적완화 개념도 >
양적완화는 시중은행이 보유한 국채나 정부보증채 등을 중앙은행이 무제한―평상시에는 중앙은행의 국채 매입이 일정 기간, 일정 범위 내로 한도가 정해져 있다―매입함으로써 은행 지급준비금을 대폭 늘리는 정책이다. 미국 연준은 양적완화를 촉진하기 위해 본래 이자가 없는 지급준비금에 이자까지 지급한 바 있다. 양적완화를 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포트폴리오 조정 효과다. 중앙은행이 시중에 유통되는 국채를 흡수함으로써 투자자들이 국채 이외의 다른 자산, 즉 주식이나 회사채 등의 위험자산을 늘리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둘째는 신호 효과다. 중앙은행이 시중은행으로부터 매입한 국채의 가격이 하락(국채 금리가 상승)하지 않도록 장기간 제로금리를 유지하겠다는 신호를 금융시장에 보내는 것이다. 두 가지 모두 장기 금리를 충분히 낮춰 궁극적으로 기업투자와 은행대출(결국, 돈)을 늘리도록 유도하는 방안이다.
하지만, 은행의 지급준비금이 아무리 늘어나도 가계와 기업이 체감하는 미래가 불확실하면 기업투자와 은행대출 수요는 늘어나지 않는다. 은행들 역시 웬만큼 우량한 가계나 기업이 아니면 대출하려 하지 않는다. 실제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 연준은 세 번에 걸쳐 대규모의 양적완화를 실시했지만, 은행 대출은 거의 늘어나지 않았다.
양적완화에 대한 오해는 돈에 대한 오해와 맞물려 있다. 많은 사람들은 중앙은행이 공짜로 돈을 찍어내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만일 한국은행의 지폐 발행비용을 2천 원이라고 가정하면 한국은행이 5만 원짜리 지폐를 발행할 때 4만 8천 원의 주조차익(seigniorage)이 발생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조차익이 너무 많아지면 돈의 가치가 하락하고 물가가 오른다고 생각한다. 사실이 아니다. 오프라인에서 지폐를 찍어내고 그 지폐를 은행이나 대통령실로 보내든, 아니면 온라인에서 직접 은행에 돈(지급준비금)을 빌려주든 간에 한국은행이 찍어내는 모든 돈은 세금의 존재에 의해 뒷받침되는 국가부채와 연결된다. 공짜가 아니다.
게다가 양적완화를 하려면 은행들이 먼저 국채를 충분히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즉, 양적완화는 은행에 대한 퍼주기 정책이 아니다. 양적완화는 기업이 낮은 금리로 돈을 빌릴 수 있도록 유도하는, 금리 조절 통화정책이 제로금리의 하한선에 가로막혔을 때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변칙적인 통화정책일 뿐이다. 기축통화국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제로금리 정책을 수행할 수 있는 것처럼 양적완화도 마찬가지다.
결론적으로 기축통화와 양적완화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창용 총재가 이를 몰랐을까? 몰랐을 수 있다. 한국은행 총재라고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니다. 뛰어난 경제학자는 경제의 큰 흐름을 읽을 줄 알고, 새로운 경제 뉴스를 큰 흐름에 맞춰 소화할 줄 아는 사람이지 실무적인 것들을 시시콜콜 아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디테일에 능한 사람들이 크고 중요한 흐름을 놓칠 수 있다. 이창용 총재는 아마도 한국은행의 실무자들이 써준 원고와 브리핑을 쉽게 믿었을 것이다.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진짜 문제는 한국은행 실무자들의 인식이다. 돈이 궁극적으로 민간 부문의 차용증에 의해 발생한다는 이론(통상 내생적 통화공급이론이라고 부른다)은 한국은행의 위상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 얘기를 잘 안 한다. 내부 의사소통의 문제일 수도 있다. 양적완화에 대한 한국은행의 무지, 또는 무시는 언론과 일반인들의 돈에 대한 사고에도 지대한 영향을 준다. 우리나라 통화정책의 구조적인 부실, 심지어 금융감독 시스템의 구조적인 문제도 돈에 관한 잘못된 인식과 연결되어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