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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란 무엇인가 - (2) 부채이론

by 노진호

‘우리’(We)라는 의미를 가진 ‘위르’(WIR)는 6만여 중소기업을 회원으로 둔 스위스 지역은행 위르은행(WIR Bank)이 발행하는 화폐(돈)의 단위다. 1‘위르’는 스위스 법정화폐 1스위스프랑과 동일한 구매력을 갖지만, 스위스프랑과 교환되지는 않는다. 중소기업이 위르은행에 대출을 신청하면 ‘위르’ 단위의 요구불예금이 대출 신청자의 은행 계좌에 입금된다. 이 요구불예금은 수만 개의 중소기업으로 구성된 ‘위르 공동체’ 내에서 지불수단이 된다. 예를 들어, 어느 식당이 위르은행으로부터 1천 ‘위르’를 대출받고 은행 회원 중 하나인 인테리어 회사에 공사를 발주하는 경우를 살펴 보자. 대출 받은 식당은 약속된 공사가 끝나면 요구불예금으로 입금된 1천 ‘위르’의 일부를 공사 대금으로 지급한다. 인테리어 회사를 포함한 위르은행의 회원 기업들은 직원 급여의 일부를 ‘위르’로 지급하며, ‘위르’를 받은 직원들은 ‘위르’를 취급하는 식당이나 카페 등에서 물건이나 서비스를 구입하고 ‘위르’로 결제할 수 있다.

위르은행의 사례는 은행이 예금(은행 입장에서는 부채)을 가지고 대출(은행 입장에서는 자산)을 만드는 곳이 아니라 대출을 통해 예금을 만드는 곳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무슨 말인가. “돈의 기원은 신뢰할 수 있는 존재가 발행한 차용증”이라고 주장하는 미첼 이네스(A. Mitchell Innes)의 얘기를 통해 살펴보자. 어느 동네에 A, B, C, D가 있다. 어느 해 봄에 목축업자 B가 농부 A에게 양모를 제공하고 차용증을 받았다. 가을이 오면 목축업자 B는 이 차용증을 A에게 제시하고 밀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B는 가을이 오기 전 어느 날 집안 잔치를 열기 위해 소고기가 필요해졌다. 그는 차용증을 도축업자 C에게 제공하고 일정량의 소고기를 얻었다. 도축업자 C도 아직 가을이 오지 않은 어느 시점에서 어떤 이유로 물고기가 필요해졌다. 그는 어부 D에게 차용증을 전달하고 D로부터 물고기를 얻는다. 비로소 가을이 왔을 때 어부 D는 농부 A에게 차용증을 제시하고 밀을 얻는다.


< 차용증이 유통되지 않는 경우와 유통되는 경우 >


위의 사례는 차용증이 돈처럼 활용되는 구조를 설명한다. 이 사례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동네 사람들이 차용증 발행자인 농부 A를 굳게 믿고 있다는 대전제가 필요하다. 그 믿음에는 차용증을 갚겠다는 농부 A의 적극적인 부채 상환 의지와 그럴 수 있는 밀 생산 능력이 모두 포함된다. 먼 지역의 사람들은 농부 A의 존재를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근대 이후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가진 은행의 등장으로 인해 농부 A가 발행한 차용증은 그가 속한 마을의 범위를 넘어 널리 유통될 수 있게 된다.

아래 그림은 근대 유럽에서 탄생한 은행들의 고전적인 기능을 보여준다. 지난번에 살펴본 신용카드 거래구조와 완전히 동일하니까 용어에 대한 설명은 생략한다. 신용카드 거래의 출발점은 (신뢰할 수 있는) 카드 회원이었다. 카드 회원이 가맹점에서 물건이나 서비스를 제공받고 발행한 차용증(외상매출채권)이 거래의 출발점이었다면, 이와 마찬가지로 아래 은행거래의 출발점은 판매회사가 납품회사로부터 물건을 제공받고 발행한 차용증이다. 이 차용증은 판매회사의 입장에서는 부채이고, 납품회사의 입장에서는 자산이다. 납품회사는 판매회사의 차용증을 은행의 차용증인 요구불예금으로 교환한다. 그러면 납품회사는 요구불예금 자산(은행 입장에서는 부채)을 이용해 ‘위르 공동체’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은행 네트워크 내에서 다른 물건과 서비스를 구입하는 대가로 사용할 수 있다.


< 근대 유럽 은행의 거래구조 >


은행들은 초기에는 기업의 차용증(어음)을 할인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차용증(은행예금)을 공급하였지만, 점차 은행 대출의 형식으로 자신의 차용증(은행예금)을 직접 공급하게 된다. 그리고 은행 대출의 대상은 믿을 수 있는 농부 A에서 기업, 그리고 주택이나 부동산 같은 담보 자산을 보유한 개인 등으로 범위가 넓어진다. 대출받은 가계나 기업이 부실화되면 은행은 파산할 수 있지만, 그렇더라도 국가의 보호에 의해 은행예금은 어느 정도까지 보호받을 수 있다. 특히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는 은행이 파산하지 않도록 은행을 철저하게 감시, 감독한다.

이 지점에서 어떤 분들은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면 한국은행이 찍어낸 지폐, 동전 등의 현금은 무엇인가? 중앙은행이 찍어내는 현금에다 지급준비금을 합쳐서 본원통화(base money)라고 하는데 본원통화가 가장 원초적인 돈이고, 시중은행은 한국은행이 찍어낸 본원통화를 키워내는 곳이 아닌가?

아니다. 현금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지불수단이기는 하지만 현금 역시 중앙은행의 차용증으로서 오늘날 은행예금과 차별성이 거의 없다. 중앙은행의 차용증이란 궁극적으로 국가의 부채라는 의미다. (국가의 부채는 가계, 기업, 자산에 부과되는 세금의 존재에 의해 유지된다) 또한, 지급준비금은 중앙은행과 은행 사이에서만 거래되는 중앙은행의 차용증으로서 민간 부문에는 유통되지 않는데, 이 역시 궁극적으로 국가의 부채와 연결된다. 한국은행은 원칙적으로 가계나 기업 등의 민간 부문과 직접 거래하지 않는다. 한국은행이 현금과 지급준비금을 은행에 무제한 공급한다고 하더라도 가계나 기업이 은행에서 대출을 받지 않으면, 시중에 돈(현금과 요구불예금)은 생겨나지 않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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