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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위 해체론이 등장하는 이유

by 노진호

4월 30일 한국은행-한국금융학회 정책 심포지엄을 재요약한 글(“공개시장운영이 나아갈 길을 모색하다”)이 한국은행의 블로그에 5월 12일자로 올라왔다. 최근 양적완화 논란에 대해 아래와 같이 해명한 글이 눈에 띄었다.


“심포지엄 참석자 모두는 주요국의 양적완화와 같은 형태의 정책을 우리나라에서 시행하기에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매우 클 것이라는 데 견해를 같이하였다. 한국은행이 대차대조표를 급격히 확대하여 본원통화가 대규모로 공급될 경우 비기축통화국인 우리나라는 통화가치 하락, 외환시장 변동성 및 자본유출 증대 등에 직면할 수 있다. 또한 주요국에 비해 국채 발행량(≒국가부채 규모)이 상대적으로 크지 않아 채권시장 왜곡 가능성이 높고, 신용창출 과정에서 자산시장이 과열될 우려도 존재한다.”


돈은 곧 차용증(=> 4/29, “부채이론” 참조)이라는 관점에서 위 글에 대해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 첫째, 은행이 대출하지 않으면 한국은행이 본원통화(≒지급준비금)를 늘려도 시중에 돈은 풀리지 않는다. 은행대출이 늘고 그로 인해 은행의 차용증인 은행예금이 늘어나야, 그다음 차례로서 은행들이 적립하는 지급준비금(본원통화)이 늘어난다. 인과관계가 반대 방향이다.

둘째, 그래도 본원통화를 쉽게 얻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면 은행대출이 촉진될 수는 있을 것이지만, 유감스럽게도 국내은행들은 지급준비금(≒본원통화)에 별로 의존하지 않는다. 국내은행의 자산 중 지급준비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2%다. 미국과 일본의 8%와 11%에 비해 낮다. 국내은행의 지급준비금 비중이 낮은 이유는 역설적으로 한국은행이 요구하는 ‘필요 지급준비율’―은행들이 의무적으로 한국은행에 보관해야 하는 예금 대비 지급준비금의 비율―이 너무 높아서다. 미국은 필요 지급준비율이 평균 0%대, 일본은 약 1%인데 한국은 5%다. 예금 중에서도 요구불예금이 7%고, 저축성예금에 대한 지급준비율은 2%다. 은행채의 경우 0%다. 따라서 국내은행들은 대출이 늘어나서 요구불예금이 생기고 그로 인해 의무적으로 쌓아야 하는 지급준비금이 늘어나면, (무수익자산이라서 기회비용이 큰) 필요 지급준비금을 줄이는 방법을 찾는다. 그 방법은 요구불예금을 고금리 은행채나 저축성예금으로 바꾸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한국은행이 본원통화인 지급준비금을 조절해도, 다른 요인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은행대출의 증감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한국은행의 표현 방식을 빌리자면, 은행들은 저축성예금이나 은행채로 자금을 조달해서 대출하려 하지, 한국은행의 본원통화를 원천으로 대출하려 하지 않는다.

셋째, 위의 밑줄에서 한국은행이 인정한 것처럼 우리나라는 국채 발행량이 많지 않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한국은행이 보유하고 있는 국채는 너무 적다. 예컨대, 미국, 캐나다, 호주, 일본 등의 경우 중앙은행이 보유한 국채는 자산의 80~90% 이상인데, 한국은행은 5%에 불과하다. 한국은행은 국채 대신 외화(외국의 차용증)를 80% 이상 보유한다. 아마도 그 이유는 한국은행이 통화정책의 삼중 난제―①환율안정, ②자본의 자유 이동, ③독자적인 통화정책의 세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할 수 없는 문제―중 어느 하나도 포기하려 하지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런 구조하에서 국내 통화정책을 잘못 사용하면 환율 불안이 초래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이 부분은 하고 싶은 말에 비해 설명이 복잡하니까 생략한다.

하지만 넷째, 가장 하고 싶은 말인데, 국내 통화정책의 실질적인 주도권은 금융위원회로 넘어갔다. 한국의 금융감독기구, 즉 금융위와 금감원은 다른 나라와 달리 금융회사의 영업에도 깊이 개입한다. 예컨대, 매달 부동산 대책 회의를 열어 은행들이 대출을 얼마나 늘렸는지 점검한다. 각종 인허가권을 가진 금융위의 관심은 은행을 비롯한 금융회사의 영업 행위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 한국은행이 시중은행 대출에 영향을 주기 위해 본원통화를 아무리 조절해도 그 영향력은 제한적이다. 반면, 금융위는 말 한마디만 해도 금융회사들이 알아서 대출을 조절한다.


< 한국은행과 금융위원회의 권한 개념도 >


은행대출은 돈, 즉 은행예금을 창출한다. 은행대출은 기업의 생산활동과 미래 전망에 비례해서 늘어나거나 줄어든다. 따라서 한국은행은 경기가 좋을 때 돈이 너무 풀리지 않도록 목표 금리를 높여 대출 감소를 유도하고, 경기가 나쁘면 목표 금리를 낮춰 대출 증가를 유도한다. 이것이 통상적인 통화정책이다.

그런데 주택이나 부동산 대출은 꼭 그렇지 않다. 주택이나 부동산 투자자는 수급이나 규제, 심리적 요인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도심 아파트 가격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토지는 생산적인 자산으로 구분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주택과 부동산 관련 대출은 금융위의 정책적, 정무적 판단에 영향을 받아서 기업경기와 무관하게 늘었다 줄었다 한다. 이게 과연 바람직할까?

경기가 심각한 수준으로 침체하면 한국은행이 제로금리나 양적완화 정책을 펼치기 이전부터 이미 채권시장이나 외환시장은 불안해진다. 양적완화는 금융시장 불안의 대책이지, 불안의 원인이 될 수 없다. 한국은행이 불필요한 양적완화 논쟁에 휘둘리지 말고, 금융위에 뺏긴 통화정책의 주도권부터 회복해서 경기를 안정적으로 조절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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