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부채 알러지
세계 3대 신용평가사 중 하나인 무디스는 5월 16일 미국의 국가부채가 과다한 수준인 데다, 공화당이 추진 중인 대규모 감세안이 이를 더 악화시킬 가능성이 크다면서 국가(국채)신용등급을 최고 수준인 ‘AAA’에서 ‘Aa1’으로 한 단계 강등했다. 미국 국채의 신용등급은 이미 2011년 S&P, 그리고 2023년 피치에 의해 최고 수준에서 각각 한 단계씩 강등된 바 있다.
하지만 과거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채권 유통시장에서 거래되는 미국 국채의 가격에는 변화가 없었다. 5월 20일 발행시장에서 일부 국채의 입찰이 부진했고 이로 인해 30년짜리 초장기 국채의 금리가 일시 급등하기는 했지만, 평균적인 국채금리는 큰 변화가 없거나 일시적 상승 후 신용등급 강등 이전의 상태로 돌아갔다. 앞으로도,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로, 국가신용등급 하락의 영향은 제한적일 것이다.
왜냐? 국가는 파산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가가 국채의 원금이나 이자를 갚지 못하겠다고 파산이나 지급유예를 선언하는 경우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유형에 국한된다. 첫째, 자국통화 아닌 외국통화 표시로 국채를 발행하는 경우다. 외화 표시 국채를 발행하는 이유는 자국 내 기술과 식량, 의약품 등이 부족해 해외로부터 주요 제품을 수입하고 설비투자를 할 수 있는 외화를 얻기 위해서다. 개도국이나 저성장국 대부분이 여기에 해당된다. 외화가 필요한 개도국들은 고정환율제도를 채택함으로써 언제든지 자국통화를 약속된 비율의 외화로 바꿔주겠다고 공언하고, 무역수지 흑자로써 외환보유고를 안정적으로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 외국인들이 외화를 빌려준다. 하지만 생산성 하락이나 자연재해, 정치적 갈등, 무역수지 적자의 지속 등으로 외환보유액이 부족해질 우려가 있다고 의심되는 순간 개도국의 통화가치는 급격히 흔들린다. 개도국 정부가 자국통화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방향으로 고정환율을 변경할 것이라고 우려하는 외국인들은 더 이상 외화를 빌려주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개도국 통화가 헐값이 되기 전 하루라도 먼저 외화로 바꾸려는 외국인이 늘어난다. 그러면 외환보유액은 급격히 감소하고, 외화표시 국채도 상환하기 어려워진다. 1980년대 중남미 국가들의 외채 위기가 여기에 해당한다.
둘째, 자국통화 표시 국채를 발행할 수 없는 경우다. 2009년 10월 그리스 재정의 분식회계 논란이 발생하면서 재정적자와 국가부채 규모가 큰 그리스, 이탈리아, 아일랜드, 포르투갈, 스페인 등의 국채 가격이 급락했다. 이들의 국채 가격이 급락한 것은 유로 회원국은 독자적인 통화 표시의 국채를 발행할 수 없고, 유럽중앙은행도 개별 회원국의 국채를 임의로 매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국채를 통해 자금(유로화)을 조달하기 어려워진 그리스의 경우 2010년과 2012년에 각각 두 차례의 구제금융을 받았다. 그리스 정부와 채권단 간의 합의가 불발된 2015년 6월에는 국채 디폴트를 선언하자는 안건이 그리스 국민투표를 통과하였다. 하지만 대규모의 구제금융 지원으로 그리스 국채 디폴트는 결국 일어나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남유럽 재정위기 이후 유럽중앙은행이 각국의 국채 매입 규모를 늘리면서 재정위기를 겪었던 국가들의 부채는 더 늘어났고 경제도 조금 살아났다. GDP 대비 국가부채는 2008년과 2023년 사이에 그리스는 111%에서 165%로, 이탈리아는 106%에서 135%로, 포르투갈은 76%에서 98%로, 스페인은 40%에서 105%가 되었다.
셋째, 정치적이거나 고의인 경우다. 자국통화 표시로 국채를 발행했다가 국채 디폴트를 선언한 사례는 러시아의 모라토리엄 선언이 유일하다. 러시아는 경제와 금융불안의 여파로 달러화 자금이 빠져나가 외환보유액이 급속히 감소하자 1998년 8월 17일에 고정환율제도를 포기하고 변동환율제도로 전환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문제는, 러시아 상업은행들의 외화부채가 총부채의 25% 수준이라는 점이었다. 따라서 러시아 정부는 변동환율제도로 전환하는 데 그치지 않고, 1999년 이전에 만기가 도래하는 액면가 3,870억 루블의 자국통화 표시 단기국채에 대한 지급유예 조치까지 발표하였다. 3,870억 루블은 달러화로 환산하면 당시 외환보유고의 8배 수준이었다. 러시아 정부가 국채 지불유예를 선언한 것은, 국채에 투자했던 외국인들이 상환된 루블화 원리금을 러시아 외환시장에서 외화로 바꿀 경우 환율이 급등해 러시아 상업은행들의 외채 부담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변동환율제도를 채택하고 (철저한 금융감독 등으로) 민간은행의 외화 자산과 외화 부채가 균형 잡힌 나라에서는 자국통화 표시 국채가 디폴트에 처한 사례가 없다. 정부가 국채를 발행하는 이유는 재정지출을 하기 위해서다. 재정지출은 소비성향이 높은 저소득 가계에 대한 보조금이나, 벤처회사 지원금, 공공 펀드 조성, 공공 인프라 투자에 참여하는 민간 회사에 대한 프로젝트 대금 등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된다. 재정지출은 정부가 국채 판매를 통해 얻은 은행 요구불예금을 가계와 기업의 은행 계좌로 이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재정지출이 이루어지면 돈이 풀린다. 따라서 재정지출이 금리를 높여 기업 투자나 회사채 발행을 위축시킨다는 소위 밀어내기 구축효과(crowding out)는 발생하지 않는다. 오히려 ‘호텔경제학’에서 살펴본 것처럼 “국채 발행 → 재정지출 → 소득 증가(→소득세, 법인세 발생) → 소비 증가(→부가가치세 발생) → 소득 증가 → 소비 증가 → ⋯” 의 순환고리가 형성된다. 만일 재정지출이 GDP 성장률과 생산성이 높아지는 방향으로 활용된다면 국채 발행액보다 세금 증가폭이 더 커서 국가부채의 규모는 오히려 감소할 수 있다.
물론, 재정지출에는 수많은 난관이 있다. 무엇보다 정부는 효율성이 낮다는 점, 과도한 복지지출로 생산성 증가 없이 미래의 세금만 늘어날 수 있다는 우려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렇다면, 재정지출의 부작용을 극복하는 방법을 찾고, 낭비되지 않도록 투명한 집행 구조를 만드는 게 순리 아닐까. 우리보다 GDP 대비 국채 비율이 훨씬 더 높은 나라 중에는 복지 수준과 생산성이 동시에 높고, 소득(GDP) 대비 땅값도 싸고, 가계부채도 훨씬 적은 나라들이 많다. 국가는 파산하지 않는다는 점을 활용하자는 논의는 없고, 국가부채 얘기만 나오면 덮어놓고 과잉 반응부터 보이는 발본색원의 멘탈리티는 바람직한 것일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