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수엘라의 경제 위기는 2014년 여름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에서 40달러로 급락하면서 시작되었다. 베네수엘라의 주력 수출품은 석유이고, 정부가 석유산업을 국유화했기 때문에 유가 급락은 정부 수입(revenue)의 급감을 의미했다.
하지만 베네수엘라 정부는 지출을 줄이지 않았다. 재정지출의 주요 원천이 석유 판매 대금에서 중앙은행이 찍어낸 돈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방식은 물가 상승을 유발할 수 있다. IMF에 의하면, 베네수엘라의 실질 GDP 성장률은 2013년 1.3%에서 2014년 –4%, 2015년 –6%, 2016년 –17%, 2017년 –16%, 2018년 –20%, 2020년 –30% 등으로 계속 떨어졌고 인플레이션은 2014년 57%, 2016년 254%, 2017년 494%, 2018년 929,790%로 급등했다. 2013년부터 2023년까지 베네수엘라의 1인당 GDP는 74% 떨어졌고, 3천만 명의 인구 중 770만 명이 해외로 이주했다.
베네수엘라의 경제 파탄은 전임 대통령 차베스의 실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차베스 대통령이 1999년에 취임한 직후 국제 유가와 상품 가격이 장기간 상승하는 ‘슈퍼 사이클’이 도래했다. 차베스는 석유산업을 국유화한 뒤 석유 수출로 인해 벌어들인 돈의 대부분을 복지적 재정지출에 투입했다. 부족한 돈은 중앙은행에 국채를 판매해 마련했다. 석유회사만 국유화한 게 아니었다. 농업, 시멘트, 철, 석유, 소매, 통신, 은행까지 국민의 생활과 관련된 수천 개의 회사가 국유화됐다. 쌀과 닭고기를 포함해 수천 개의 소매 상품에 대한 가격 통제도 시작됐다. 기업의 이윤이 일정 수준을 넘으면 임직원을 처벌하는 법도 생겼다. 민간 기업들이 사라졌다.
2013년 차베스가 사망하고 후계자인 마두로가 집권했다. 때마침 2014년 유가가 급락했다. 마두로는 국민 생활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물건 가격과 기업의 이윤 통제를 유지했다. 고정환율제도도 유지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재정지출을 유지하기 위해 중앙은행에서 돈을 찍어냈다. 생필품을 수입할 달러는 부족했고, 물건은 사라졌으며, 암시장 환율과 물가가 급등했다. 2018년에는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하지만, 마두로는 2019년과 2024년에도 연거푸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야당과 언론 탄압, 부정선거 의혹 등으로 서방의 석유 판매 제재까지 받게 됐다. 올해 4월에는 비상 재정 조치가 또다시 선포됐다. 6월 22일에는 정부가 발표하지 않는 경제 상황을 조사하던 수십 명의 경제학자와 분석가들이 체포됐다. 베네수엘라의 경제 위기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베네수엘라 경제 파탄의 원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오랫동안 누적된 분배 악화가 포퓰리즘을 불러왔다. 베네수엘라는 석유 매장량 세계 1위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빈곤율이 높았다. 소득이 빈곤선 이하인 인구의 비율, 즉 절대 빈곤율은 1980년대 후반 45%, 1990년대 후반 70%였다. 석유 수입은 소수의 부자에게 귀속되었다. 하지만 차베스의 집권 이후 (빈곤선 기준이 약간 달라졌지만) 절대 빈곤율이 하락하기 시작해 2000년에는 42%, 2010년에는 27%까지 하락했다. 빈곤율의 극적인 하락은 차베스와 그의 후계자인 마두로를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의 증가로 이어졌다.
둘째, 전체주의의 부활로 민주주의 견제 기능이 마비됐다. 2014년 유가 급락 이후 마두로 정권은 가격 규제를 완화해야 했다. 고정환율제도의 폐지, 가격과 기업이윤 통제의 폐지를 통해 총수요를 줄이고 공급 능력을 개선해야 했다. 가격의 상승은 단기적으로 고통을 수반하면서 수요를 줄인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은행 차입과 투자를 통해 생산능력을 확대하는 인센티브로 작용한다. 하지만, 마두로는 개혁을 거부했다. 여당 내에서는 용기 있게 반대하는 사람이 사라졌으며, 반대하는 야당은 탄압했다. 시장에서는 물건이 사라졌고, 물가 상승 압력은 결국 폭발했다.
셋째, 국가의 공급 능력을 경시했다. 베네수엘라의 석유는 유질이 좋지 않아 정유시설에 대한 재투자가 필요했다. 하지만 차베스 대통령은 석유 인프라에 대한 투자를 소홀히 했다. 게다가 소비 산업을 국유화했고 가격과 이윤도 통제하는 바람에 자국에서 싸게 만들 수 있는 생필품까지 해외에서 더 싸게 수입하도록 만들었다. 이로 인해 2014년 이후 유가 급락에 따른 매출 급락을 석유 생산량 증대로 만회하지 못하게 됐다. 생필품의 부족 역시 국내 생산으로 만회하지 못할 정도로 국내 기업의 생산능력은 크게 약화 돼 있었다. 2012년 기준으로 800억 달러 이상이던 수입(import)이 2017년 100억 달러 정도로 급감하자 물자 부족이 극에 달했다.
한편, 차베스 대통령은 복지적 재정지출을 크게 늘렸지만, 그의 재임 중 국가부채는 별로 늘어나지 않았다. 베네수엘라의 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은 마두로가 집권하고 유가가 급락하면서 2013년 33%에서 2014년 85%, 2016년 138%, 2018년 175%, 2020년 339%로 급증했다. 국가부채는 국채 발행→재정지출→소득 증가→정부수입(세금 등) 증감→국채 상환의 순서를 통해 늘어나거나 줄어든다. 재정지출에도 불구하고 소득과 세금이 늘어나지 못하면 국가부채가 증가한다. 미래가 불확실해서 저축만 하고 소비를 하지 않으면 소득은 발생하지 않는다. 이 경우 재정지출은 국가부채만 증가시킨다. 공급능력과 물건이 부족한 경우에도 재정지출은 실질 소득의 증가 없이 물가와 국가부채만 증가시킨다. 소득 대비 국가부채의 급격한 증가는 베네수엘라의 경우처럼 경제 악화의 원인이 아니라 경제 악화의 결과다.
베네수엘라는 빈곤율이나 민주주의 측면에서 한국의 비교 상대가 되지 않는다. 베네수엘라의 빈곤율 계산에 적용되는 세계은행의 빈곤선(1일 소득 3달러 미만)을 한국에 적용하면 빈곤율이 0%가 된다. 우리나라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하지만 GDP 대비 1%에 훨씬 못 미치는 국채를 발행해 소비쿠폰을 발행하는데, 이를 국가부채 문제와 연결하면서 베네수엘라와 비교하는 것은 쓸모없는 분석이다. 그런 식의 단순하고 유치한 분석이 베네수엘라 유권자의 눈을 흐리고 국가를 몰락시킨 진짜 포퓰리즘이다.
(추신1) 베네수엘라에서 미국으로 이민 간, 한국에 대해 관심이 많다는 어느 분께 지인을 통해 위의 글을 보여드렸다. 그분은 지인에게 “이 분석이 베네수엘라 잘 경제를 설명하고 있다(I can assure you that the analysis represents the Venezuelan economy)”는 덕담을 해 주셨다.
(추신2) 국가부채는 national debt가 아니라 government debt로 표시된다. 국가는 가계와 기업과 정부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국가부채보다는 정부부채가 맞는 말이다. 폐쇄경제 하에서는 가계와 기업, 정부의 순자산을 합치면 0이 된다. 지출은 누군가의 소득이다. 재정지출을 늘리면 물가가 상승할 수 있지만, 수요가 늘어나지 않고 경기가 살아나지 않으면 물가는 상승하지 않는다. 그런 재정지출은 정부부채가 증가하는 것과 동일한 액수만큼 가계・기업의 소득이 증가하고 부채가 감소하는 선에서 끝난다. 정부부채를 마구 늘려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정부부채는 미래의 세금 부담이라는 이상한 내러티브가 문제다. 미래 세대에게 주어야 할 것은 생산능력과 일자리이고, 생산능력에 비해 과도한 정부부채는 물가 상승의 한 원인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