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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에 대한 오해가 불러올 스테이블 코인 디스토피아

by 노진호

내로우 은행(narrow bank)이란 대출 없는 은행을 의미한다. 예컨대 증권사 CMA처럼 예금을 받으면 그것으로 국채 같은 안전자산을 구입하고, 예금은 지급결제 용도로만 사용하자는 게 내로우 은행이다. 내로우 은행은 돈―믿을 수 있는 기관이 발행한 차용증―의 속성을 잘 모르는 이상주의자들이, 빈번한 은행 위기의 재발을 막기 위해 만든 개념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어제 국회에서 원화 스테이블 코인에 대한 세미나가 열렸다고 한다. 원화 스테이블 코인을 발행한다는 것은 내로우 뱅킹을 확대하겠다는 얘기인데, 신문으로 봐서 정확한 내용은 모르겠지만, 대부분은 낙관론을 피력했고 한국은행 측에서만 "원화 스테이블 코인이 발행되면 기존 자본규제 우회, 금산분리 원칙 충돌 등의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우려했단다.

모든 은행이 내로우 은행이 된다면 금융위기는 사라질 수 있다. 대출이 없어지면 신용 위험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내로우 뱅킹은 (대출의 무리한 확장을 막기 위한) 자본규제와 (대출의 주체인 기업이 대출에 관여하는 것을 막기 위한) 금산분리, 심지어 금융감독도 필요 없는 시스템이다. 하지만 대출이 없어지면, 회사채를 발행할 수 있는 소수의 기업을 제외한 나머지의 기업들은 문을 닫아야 한다. 조금 과장하자면, 금융위기를 막기 위해 모든 은행을 내로우 은행으로 만들자는 얘기는 무좀을 없애기 위해 발목을 자르자는 무서운 얘기랑 비슷하다.

아래 은행의 ‘가상’ 대차대조표를 통해 내로우 뱅킹化, 즉 스테이블 코인의 도입으로 생기는 문제를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자. 자기자본 비율(=자기자본/자산) 규제가 10%인 어느 나라에서, 은행들이 결제시장의 주도권을 뺏기지 않으려고 스테이블 코인을 +1,000만큼 대규모로 발행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스테이블 코인을 발행한 은행들의 대차대조표는 아래 오른쪽 표와 같이 ①스테이블 코인의 대체재인 은행예금의 감소(-100), ②담보자산인 국채의 증가(+1,000), ③자기자본 규제 비율을 맞추기 위한 자기자본의 증가(+100)와 같은 변화로 이어진다.


위의 표에서 보듯 스테이블 코인 발행이 늘어나면, 국채와 같은 안전자산 수요가 늘어난다. 대신, 전체 은행 자산에서 차지하는 위험자산인 대출의 비중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내로우 뱅킹화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은행이 시중에 유통시키는 돈(=은행예금+스테이블 코인)만큼 대출을 늘리지 못하면, 자금 조달이 어려워진 기업은 생산활동이 위축된다. 공급 능력이 통화량(=은행예금+스테이블 코인)을 따라잡지 못하면 물가 상승압력은 커질 수밖에 없다. 또,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인하하거나 인상하여 은행의 차입금 조달 비용에 영향을 줌으로써 경제 내 대출을 조절하는데, 은행의 대출 기능이 위축되면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능력 역시 약화될 수밖에 없다. 이런 대내적인 문제―통화정책의 무력화와 물가 상승압력 증가―는 스테이블 코인이 활성화되는 모든 나라에서 공통으로 발생하게 될 것이다.

사실 더 큰 문제는 원화 스테이블 코인이 아니라 달러화 스테이블 코인 증가로 인해 발생한다. 이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첫째, 스테이블 코인을 거래하는 외환시장이 없기 때문이다. 외환시장은 국적이 다른 은행들이 각각의 예금을 교환하는 곳이다. 이들 예금은 각국의 중앙은행과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중앙은행과의 연계 없이 직거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스테이블 코인은 구조적으로 외환시장 같은 게 생길 수 없다. 따라서 만일 미국 정부가 무역 대금은 기존의 관행대로 수출입 기업의 은행예금으로 결제하도록 유도하는 반면, 무역 이외의 거래는 달러화 스테이블 코인으로 이루어지도록 한다면, 예컨대 미국 내 물건과 서비스, 심지어 주식이나 채권, 내구재, 미술품, 부동산 등의 자산을 스테이블 코인과 대체불가능토큰(NFT)으로 거래하도록 유도한다면, 환율은 오로지 무역수지만 반영해서 변동할 것이다. 게다가 달러화가 충분히 하락하지 않을 경우 미국이 국채 발행을 늘림으로써 달러화의 가치 하락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 미국 입장에서는 제2의 플라자 합의 같은 것을 맺을 필요도 없이 그냥 국채와 달러 스테이블 코인만 늘려도 되는 것이다.

스테이블 코인, 특히 달러 표시 스테이블 코인의 활성화로 예상되는 두 번째 부작용은 정보의 실종이다. 여태껏 은행예금의 국제 송금은 SWIFT라는 국제적인 은행 망을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달러화(은행예금)나 유로화(은행예금)에 대한 수요와 공급 트렌드를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서로 다른 민간 기관에서 발행되는 스테이블 코인은 그 흐름을 파악하기 어렵다. 파악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드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최근 미국 의회를 통과한 GENIUS법에 의하면 미국 스테이블 코인은 익명성이 원칙이다. 실명으로만 사용할 수 있는 스테이블 코인은 미국의 그것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져서 국제적으로 유통이 안 될 것이다. 따라서 이제 달러화를 비롯한 각국 통화 사이의 수요와 공급은 파악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면 환율의 변동성은 매우 커지게 될 것이다.

이처럼 달러화 스테이블 코인의 도입은 미국에만 유리하거나 모두에게 불리한 정책이다. 돈의 출발점을 시장(기업과 은행)이 아닌, MAGA를 표방하는 정부(국채)의 위에 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스테이블 코인을 대규모로 발행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대책부터 먼저 세워야 한다. 그 대책은 우리의 경제 구조를 대외 무역 중심에서 내수 중심으로 바꿔야 하는 문제, 정부의 국채 발행과 재정정책을 어떻게 운용할 것인지의 문제와도 맞물려 있다. 어느 경우이든 한국도 스테이블 코인을 서둘러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은 매우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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