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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에 대한 오해가 불러올 경제-외교 정책의 딜레마

by 노진호

미국 내 경제연구소 CEPR(Center for Economic and Policy Research)에 딘 베이커(Dean Baker)라는 경제학자가 최근 다음과 같은 내용의 보고서를 올렸다. “한국 정부가 상호관세를 10%p 낮추기 위해 트럼프 행정부에 $3,500억(약 488조 원)을 내는 대신, 그 돈의 1/20만큼을 수출 감소로 피해를 본 노동자와 기업을 지원하는 게 훨씬 나을 것”이라는 주장이 담겨있다. 그의 계산에 의하면, 한국에 25%의 상호관세가 부과되면 한-미 대통령이 합의한 15%의 상호관세가 부과되는 경우에 비해 $125억의 추가적인 수출 감소가 발생한다. 125억 달러는 한국 GDP의 0.7% 수준이다.

베이커의 계산식에는 가정에 가정이 중첩되어 있어서 정밀한 분석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하지만, 한국 대미 수출의 가격 탄력성이 –0.41이라는 연구도 있고, 상호관세 부과 전후 트럼프 행정부와 미국기업연구소가 추정한 미국의 수입 수요 탄력성이 각각 –0.25와 –0.945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크게 잡아도(즉, 미국의 한국 제품에 대한 수요 탄력성을 –1로 가정해도) 10%p의 추가 관세로 인해 한국이 잃게 될 수출 감소분은 딘 베이커가 추정한 GDP의 0.7%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요한 것은 보고서의 주장이다. 베이커는 한국과 일본이 대미 투자를 포기하는 게 낫다고 주장했고,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EU의 GDP는 러시아 GDP의 5배 이상이다. EU는 러시아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군대를 키울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 트럼프의 손을 잡을 필요가 있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은 대만까지 합쳐도 경제 규모가 중국의 1/3 미만이다. 중국보다 더 빠르게 성장할 수도 없다. 중국의 군사력을 따라잡을 수 없는 한국과 일본이 중국과의 새로운 타협점을 모색하는 대신, 미국만 믿고 트럼프를 위해 아무 대가 없이 장기투자(한국의 경우 $3,500억, 일본은 $5,500억)를 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라는 게 대략적인 내용이다.

국제관계에 관한 한 내가 덧붙일 수 있는 말은 없다. 다만, 딘 베이커의 정치 경제학적인 결론에 ‘돈’에 대한 중요한 관점을 덧붙여서 두 가지 보충 설명을 하고 싶다. 첫째로 돈은 포인트에 불과하며, 중요한 것은 포인트 자체가 아니라 정부가 포인트를 활용해 얻을 수 있는 실물 경제적 성과라는 점이다. 수출 기업의 영업이익률이 10%라고 가정하면, 125억 달러의 수출 감소로 인해 발생하는 수출 기업의 기회비용은 12.5억 포인트(달러 환산)이고, 현재 환율을 적용해 원화로 환산하면 1조 7,425억 포인트(원화 환산)가 된다. 1조 7,425억 원을 수출 기업과 근로자에게 10년 동안 지원하면 17조 4,250억 원이다. 이 돈은 한국 측에서 약속한 대미 투자액 488조 원의 약 4%로서 미국에 투자했다가 10년 뒤 4%의 누적 손실을 입거나, 설령 원금이 유지되더라도 달러화의 상대적 가치가 4%만큼 떨어진 것과 동일한 구매력을 가진다. 10년 뒤에는 미국 투자로 이득을 볼 수도 있고, 달러화의 가치가 상승할 수도 있지 않냐고? 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488조 원의 투자처를 직접 정할 것이며(아마도 트럼프 행정부는 자국 기업들이 투자를 회피하는 위험한 분야에 한국 돈 488조 원을 투자할 것이다), 이익의 90%는 자기네들이 가져가겠다고 고집하고 있다. 또 관세 협상이 마무리되면, 소위 제2의 플라자 합의가 미국 주도로 맺어져서 달러화의 가치가 크게 하락할 가능성도 있다. 투자 위험이 높고, 달러화의 가치 하락이 예상되는 현 상황에서 한국의 488조 포인트(원화 환산)를 달러 포인트로 바꿔서 미국에 고스란히 바치겠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매우 이상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이와는 다른 각도에서 둘째, 외환보유액에 대한 오해가 정책 판단을 꼬이게 할 수 있다. 외환보유액은 경상수지 흑자의 부산물이자 경상수지 흑자를 유지하기 위해 정부가 한국은행을 통해 외환시장에서 달러를 구입한 결과로 정부의 장부에 누적된 달러 표시 포인트다. 국부이면서 대외 구매력일 수 있고, 외환위기에 대비한 안전장치일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변동환율제 국가이고, 변동환율제도 하에서는 이론적으로 외환위기가 발생하지 않는다. 외환위기는 자원과 기술이 부족해서 고정환율제도를 운영할 수밖에 없는 나라에서 주로 발생한다. 외환보유액은 그런 나라의 고정환율제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장치일 뿐이다. 금융회사의 외화 부채가 많으면 환율 불안이 은행 위기와 금융불안으로 전이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건 금융 규제와 감독으로 예방할 수 있는 문제다. 예컨대 금융회사의 외화 순부채(=외화부채-외화자산)를 제로(0) 내지 총이익의 일정 범위 내로 제한하고, 1년 이내 만기가 돌아오는 외화 부채에 대비해 외화 유동성을 충분히 보유하도록 한다면 외화 부족과 환율 불안에 기인한 은행 파산과 금융 불안은 발생하지 않는다. 환율이 급격하게 상승해도 당장 외채를 갚지 못하는 은행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즉 금융감독을 잘 수행한다면, 환율 상승은 오히려 수출 경쟁력을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물론 물가가 오르는 부작용은 있다) 변동환율제의 나라에서 외화 부족에 기인한 금융 불안을 걱정하는 것은 금융감독을 믿지 못하겠다는 의미와 같다.

구매력을 갖는 포인트(돈)의 지출은 누군가의 소득 증가와 2차적 지출을 통해 자산 축적, 혹은 부채 상환으로 귀결된다. 이 과정에서 노동력이 활용되며, 일부 포인트는 세금으로 흡수된다. 국가는 도덕적 해이를 유발하지 않도록 감시하면서 실물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포인트 지출을 적절히 활용할 수 있다. 포인트를 잘못 사용하는 것과 아예 사용하지 않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정부는 국채 발행과 정부 지출을 통해 포인트를 활용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만일 정부가 중국과 장기적으로 평화적인 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면, 미국에 488조 원 상당의 돈을 헌납하는 대신, 그 돈(포인트)의 일부를 금융회사에 팔아서 금융회사의 외화 자산을 늘려주고, 그 대가로 얻은 원화(포인트)를 사용해 국채 발행 없이 수출 기업과 노동자를 지원할 수도 있다.

물론, 중국을 도저히 믿을 수 없거나 미국을 등지면 국내외 정치-외교적으로 복잡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게 걱정된다면, 아깝더라도 정부의 외환보유액을 미국에 과감하게 투자해야 한다. 이 경우 금융감독을 좀 더 강화하면 된다. 경제 문제를 우선할 것인지, 정치-외교 문제를 우선 고려할 것인지는 정부와 국회, 그리고 정치에 관심 있는 국민들의 선택에 달려 있다. 하지만 정부부채를 막연히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국가부채 종말론, 그리고 달러화 지폐에 대한민국의 수호신이 숨어 있다는 외환보유액 물신론(fetishism)에 빠지면 어떤 책임 있는 선택도 할 수 없는 딜레마에 직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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