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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보유액에 대한 과신과 한-미 통화스왑의 문제점

by 노진호

최근 한국과 미국의 관세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졌다. 먼저 미국은 관세 25%를 15%로 낮추는 대가로 한국이 현금으로 $3,500억을 투자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고, 한국은 그렇게 되면 외환보유액이 얼마 남지 않게 되니 먼저 무제한 통화스왑을 해달라고 하고 있다. 미국이 받아들이기 힘든 요구를 함으로써 $3,500억 달러를 투자하지 않겠다는 것이라면 훌륭한 전략이지만, $3,500억을 투자하되 통화스왑을 통해 외환 리스크를 차단하겠다는 생각이라면 위험해 보인다.

외환보유액은 정부와 중앙은행이 보유하고 있는 외화 표시 자산을 의미한다. 민간이 보유한 외화 자산은 외환보유액에 포함되지 않는다. 외환보유액은 ①대외부채 상환, ②수입대금 결제, ③외환시장 개입 등을 위해 필요하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이유로 외환보유액의 역할과 능력을 과신하면 안 된다.

그 이유는 첫째, 대외부채의 안정적인 상환을 위해서는 외화부채 관리가 더 중요하다. 정부와 민간 금융회사가 각각 외화 순자산과 단기 유동성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안전 보조장치에 불과한 외환보유액은 아무리 많아도 소용없다. 둘째, 안정적인 수입대금 결제를 위해서는 무역구조가 더 중요하다. 환율이 급등하는 비상 상황이 발생하면, 당연히 외환보유고를 수입(import)회사에 빌려주어야 한다. 하지만 환율이 상승하면 수입은 줄고 수출이 늘어난다. 그러면 외화 부족은 곧 해소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무역수지 구조다. 환율 급등에도 불구하고 수출이 늘지 않는다면 역시 외환보유액이 아무리 많아도 소용없다. 세 번째는 앞의 두 가지 경우와 중복된다. 한국은 변동환율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변동환율제도 하에서는 잡아놓은 물고기(외환보유액)보다 물고기를 잡는 능력, 즉 외화 순자산의 안정적 관리와 무역수지 구조가 더 중요하다. 개인적으로 한국의 3개월치 수입물량(현재 시점 기준으로 약$1,500억 정도)에 해당하는 외환보유액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그래도 미래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외환보유액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할 수 있다. 나아가 외환보유액에 대한 걱정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아예 미국과 통화스왑을 맺는 게 좋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역시 다른 문제를 유발할 수 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통화스왑은 글자 그대로 통화를 바꾼다는 의미다. 예컨대, 한국은행이 미 연방은행으로부터 일정 기간 달러화를 빌리면, 한국은행은 빌리는 시점의 환율로 한국의 원화를 미국 연방은행에 담보로 제공한다. 이것은 미국이 중앙은행의 최종대출자(lender of last resort) 기능을 확장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낳는다. 달러 유동성 부족에 빠진 해외 은행들을 위해 미국 연준이 (해외 국가의 통화를 담보로) 달러화 지급준비금을 무제한 빌려주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뉴욕 연준에 의하면, 미국이 해외 은행들을 대상으로 최종 대부자 기능을 제공하는 이유는 글로벌 금융불안이 미국으로 전이되는 것을 막고, 달러의 국제화를 촉진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앞으로 만일 한국에서 국지적인 외환위기 비슷한 게 발생한다면, 그 원인이 정확히 무엇인지 (외채 관리 실패인지, 무역구조의 문제 때문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단지 한국이 미국에 대규모로 투자하는 바람에 외환보유액이 부족해졌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통화스왑을 체결해도 될까? 미국 연방은행이 그렇게까지 배려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고 생각되지만, 혹시라도 그렇게 한다면 고마워해야 할 게 아니라 두려워해야 한다. 예컨대 미국에 투자하는 $3,500억에 대한 리스크가 훨씬 더 커질 수 있다. (통화스왑 체결했으니, 이제 투자는 완전히 미국 마음대로)

미국 연방은행이 순수하게 선의로, 유사시에 미국의 이익과 무관하더라도 한국과의 우호 관계를 위해 한국에 달러 유동성을 제공하기로 약속한다고 가정하자. 하지만 그래도 득보다 실이 더 크다. 국내 은행들은 국내 가계와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소매 영업에 치중하고 있다. 해외에서 활동하는 대기업을 상대로 거액의 달러화를 빌려주고 동시에 그만큼의 달러화 예금을 안정적으로 조달하거나 유지할 수 있는 국내 은행은 없다. 만일 한국은행이 미국과의 통화스왑을 체결한다면, 국내 은행들은 해외 대기업 대출 영업을 시도(갈 길이 멀다)하는 대신, 해외에서 낮은 금리로 달러화를 빌려서 원화로 바꾸고 이를 국내 주택담보대출이나 개인 신용대출로 운용하려고 할 가능성이 크다. 무제한 통화스왑의 존재로 인한 일종의 도덕적 해이다.

1997년 외환위기 전의 국내 금융회사들이 그랬다. 당시의 은행과 종금사들은 정부의 암묵적 보증을 믿고, 해외에서 저금리의 외화를 대규모로 빌려와 원화로 바꾼 뒤 국내 대기업들에게 빌려줬다. 이로 인해 국내 금융회사의 대차대조표는 “외화 단기부채와 원화 장기자산(대기업 대출)”으로 구성되었다. 이로 인해 1997년 아시아 금융불안 여파로 달러화를 구하기 어려워졌을 때 정부는 딜레마에 직면하게 된다. 정부가 고정환율제도를 포기하면 환율이 상승해 시중은행들이 갚아야 할 단기 외화부채 규모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파산위기에 내몰린다. 하지만 고정환율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외환시장에 개입하면 달러화가 빠져나가 외환보유액이 고갈된다. 결과적으로 1997년 말 외환보유액 고갈로 인한 IMF 구제금융 신청과 고정환율제도 포기, 금융회사 구조조정은 모두 불가피했다.

지금 미국 연방은행과 통화스왑을 체결한다면, 외환위기 직전과 비슷한 은행 재무(외화 단기부채와 가계 주택담보대출 중심의 원화 장기자산) 구조가 다시 만들어질 수 있다. 막으면 되지 않냐고? 장담하기 어렵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은행의 외화 차입이 쉬워지는 방향으로 규제가 점점 느슨해질 수 있다. 강력한 통화스왑제도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앙은행 간 통화스왑은 외화 유동성을 잠시 빌려주는 제도이지, 외화를 장기적으로 대출해 주는 제도가 아니다. 하지만, 통화스왑이 존재한다면, 저금리의 단기 외화가 국내 자산버블의 길을 우회적으로 개척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한-미 통화스왑은 위기 시의 만병통치약이 아니라 평상시의 마약이 될 수 있다.


(추신) 변동환율제도 하에서 환율이 급등하면, 원화로 표시된 국내 주식에 투자한 외국인들은 외환시장에서 결정되는 불리한 환율을 계산해서 당장 손실을 보고 빠져나갈지 아니면 저가 매수 기회라고 생각해서 오히려 물타기를 할지 스스로 결정할 것이다. 주식투자 손실은 투자자의 몫이고, 외국인도 예외는 없다. 혹시라도 외국인 주식투자자 보호를 위해 외환보유액을 사용하면 부작용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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