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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부채라는 이름을 바꿔야 하는 이유

by 노진호

경제성장률은 노동생산성 증가율에 취업자 증가율을 더한 값과 같다. 노동생산성과 취업자 증가율이 각각 2%와 3%면 성장률은 5%가 된다. 이런 관계는 노동생산성(실질GDP/노동력)에 노동력을 곱하면 실질GDP가 도출되는 항등식으로부터 얻어진다.

최근 5년간 우리나라에서 노동생산성이 가장 빠르게 증가한 산업은 광업이다. 채굴 장비의 고도화와 고용 감소 덕분이다. 반면 보건 및 사회복지서비스업은 고령화로 최근 5년간 노동수요가 가장 많았는데 요양보호사 1인이 돌볼 수 있는 노인의 수는 제한된다. 해서 일자리가 급증한 대신 노동생산성은 빠르게 하락했다.

역사(장기)적으로 노동생산성과 일자리는 농업, 제조업, 서비스업 등 순으로 증가했다. 현재 국내 광업과 제조업의 평균 노동생산성은 서비스업보다 크게 높다. 하지만 일자리는 줄어들고 있다. 생산성 높은 광공업 부문에서 그렇지 못한 서비스 부문으로 노동력이 이동하면 국민의 만족 내지 복지 수준을 의미하는 후생(welfare)은 늘어날 수 있으나 수치상 경제성장률은 하락한다.

'바그너의 법칙'은 선진국이 될수록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공공지출의 비중이 높아지는 현상을 의미한다. 이 상관관계 속에는 성장과 일자리 창출, 복지의 균형이 안정적으로 유지되기 힘든 구조적인 문제가 숨어 있다. 그런데 혹자는 '바그너의 법칙'을 공공지출 망국론이나 국가부채 말세론과 섣불리 연결한다. 이는 논리의 비약이고 심각한 과장이다.

세금과 정부 수익으로 회수되지 못하는 공공지출의 누적은 소위 국가부채로 귀결된다. 그런데 국가부채는 정부부채나 공공부채라고 불러야 맞다. 컨트리뎁트(country debt)가 아니라 거버먼트뎁트(government debt) 또는 퍼블릭뎁트(public debt)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내외 가계, 기업, 정부의 금융순자산 합계는 언제나 0이다.

직관적인 이해를 위해 폐쇄경제를 가정하자. 재정지출이 증가하면 정부의 금융순자산은 줄어들지만 그것과 동일한 금액만큼 민간 부문의 금융순자산이 늘어난다. 왜냐하면 지출은 누군가의 소득이 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재정지출이 늘어나면 가계나 기업의 소득이 증가하고 그 소득은 다시 민간 소비와 투자 지출, 세금 납부로 이어진다. 최종적으로 정부지출이 세금보다 많으면 민간부문의 저축과 금융순자산은 증가하고 그만큼 정부의 금융순자산이 감소한다. 이런 제로섬 관계는 경제학 교과서에 나오는 국민소득 균형 방정식의 주요 내용이고 모든 나라의 자금순환표에 똑같이 적용된다.

가계와 기업은 소득 흐름을 기반으로 부채를 조달한다. 정부도 징세 능력을 기반으로 부채를 조달한다. 가계와 기업이 부채이자를 갚지 못하면 파산압력에 내몰리지만 고정환율제도를 채택하고 외화부채를 무리하게 조달하지 않는 한 자국 통화 표시 부채를 발행하는 정부는 파산하지 않는다. 기축통화국 여부는 상관없다.

수행성(performativity)이란 언어가 현실을 표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실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진다는 개념이다. '국가'의 부채가 늘어난다는 이유로 재정지출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서툰 번역이 초래한 수행성의 안타까운 사례다. 2024년 한국의 GDP 대비 국가(정부)부채는 약 50%로 선진국의 절반 이하다. 금융순자산은 금융자산에서 부채를 뺀 값인데 한국 정부의 금융순자산은 국가 자금순환표상 GDP 대비 43%인 1111조원이다. 이렇게 많은 나라는 찾기 힘들다.

재정지출이 세금에 비해 과도하면 물가가 상승하거나 도덕적 해이가 발생하는 등 자원의 효율적인 활용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하지만 재정지출과 정부부채를 미래의 세금과 연결하는 것은 억지다. 정부부채는 미래의 세금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며 미래세대의 불안은 일자리 부족에서 온다. 재정지출은 범위가 넓고 방법도 다양하다. 보호무역이 강화되는 지금은 재정지출을 제대로 활용하는 방법을 찾아야 할 때다.


[머니투데이, 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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