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건 지향인의 식사
나의 안전한 공간인 집에서만큼은 비건 지향인으로 살기로 다짐하자마자 내 머리를 스친 생각은 "냉장고에 있는 버터, 깐 새우, 냉동 삼겹살, 닭가슴살, 우유 같은 동물성 재료들은 이제 어떻게 하지?"였다.
나는 오랜만에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항상 "뭐 먹지?"가 고민인 사람이고, 우울한 기분이나 찜찜한 마음도 자극적이게 맛있는 것을 먹으면서 달래는 사람이다. 나의 가장 큰 취미는 사랑하는 사람이 "이제 더는 못 먹겠어" 말할 때까지 맛있는 것을 끊임없이 해서 코앞에 가져다주는 것이고, 조금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고 싶은 가장 큰 이유도 더 큰 냉장고를 설치하고 다양한 그릇들을 보관할 수 있는 주방을 갖고 싶어서다.
내가 그런 사람이니 내 집의 작은 냉장고에는 당연하게도 항상 식재료들이 가득 차 있다. 대부분의 식재료들이 유통기한이 다하기 전에 쓰이지만 어떤 것들은 시들해지거나 상하기 직전까지 냉장실에 있다가 다른 식재료들을 냉장실에 담아야 할 때가 되어서야 냉동실로 옮겨졌다. 또 어떤 것들은 금요일 저녁이나 주말에 볶음밥이나 스파게티에 왕창 넣어져 먹어치워졌다. 나는 주말이면 냉장고 문을 열고 빨리 써야 하는 식재료들을 확인한 후 그것을 어떻게 요리해서 먹을지 고민하다가, 그것들을 최대한 맛있게 잘 먹기 위해서 이마트나 쿠팡 앱으로 또 다른 식재료들을 구매하는데, 이런 나의 패턴으로 내 집의 작은 냉장고는 항상 적어도 70% 많으면 90%가 식재료로 차 있는 상태다. 비건 지향인이 되기 이전에는 그중 50%가 동물성 재료였다.
비건 지향인이 되기로 결심했으니 냉장고에 있는 동물성 재료들을 과감히 버릴 수도 있고, 친구나 이웃에게 나눠줄 수도 있고, 이왕 산 재료들은 어쩔 수 없으니 그냥 먹을 수도 있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이미 산 식재료들은 감사한 마음을 갖고 천천히 먹기로 결심했다. 육식을 하다가 비건 지향인으로 변한 나에게 그것이 더 자연스러운 흐름이자 느린 변화로 느껴졌고, 사실 인근에 식재료를 나눠줄 수 있는 친구나 이웃도 없었다.
이번 주말에 내가 먹은 버터 양배추 구이와 새우 그린빈 볶음도 그런 생각 끝에 만들어진 것이다. 비건 지향인이 되기 이전에 사두었던 버터와 새우살을 감사한 마음으로 사용해서 간단하지만 근사한 식사를 만들었다.
사실 버터 양배추 구이와 새우 그린빈 볶음은 레시피라고 할 것도 없다. 그냥 버터에 양배추를 "이거 타는 거 아닌가?" 할 때까지 오래 구웠고(간은 소금과 후추로 했고), 올리브유에 새우살과 마늘을 볶다가 냉동 유기농 그린빈을 넣었다. 좋은 버터와 좋은 올리브유, 햇 양배추를 주로 사용한 한 그릇이니 도저히 맛이 없을 수가 없다. 게다가 모젤 리슬링이라는 독일의 화이트 와인과 함께 먹었는데 기대 이상으로 잘 어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