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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다

나와 주변부를 이해하기 위한 읽기와 쓰기

by 리좀

“짧은 시간 안에 사라질 운명인 강렬한 이해를 우리 의식 속에 자리 잡게 만들기 위해서는 글을 쓰고, 쓰고, 또 써야 합니다. 읽고 또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마치 영혼의 훈련인 것처럼(실제로도 그렇습니다) 신중하게 주제를 변형해 보고 반복하기를 멈추지 않아야 합니다.” - 안드레아 클라메디치 『모든 삶은 빛난다』 中에서 -


어렸을 때 한글을 깨치고 난 후 문자가 주는 마법 같은 힘에 이끌려 탐닉하던 때가 있었다. 기호인지 신호인지 모를 주변의 갖가지 문자들, 그리고 그 문자들을 가득 모아 놓은 책들을 보면 호기심이 크게 발동되었다. 가끔 동네 책방이나 중고서점에 가서 책장 가득 꽂혀있는 책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뛰곤 했다. 그 시절에는 자기소개 취미란에 '독서'라고 쓰는 것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고, 그런 현상이 잦아들기는 했지만 이해하지 못하기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문자가 열어주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놀라운 경험은 문맹이 아닌 사람이면 누구나 원하는 것이라고 자기중심적으로 덮어놓고 생각했다. 그리고 의성어 의태어뿐 아니라 명사나 조사를 포함하는 모든 음절과 단어는 저마다의 독특한 표정이 있다고 생각했다. 독서는 수만 종류의 사람들이 짓는 수만 종류의 표정을 읽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독서의 길은 늘 재미있고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어휘와 개념, 복잡한 문장들에 맞닥뜨리면 최고의 험지에 장비도 없이 혼자 들어서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가기 쉬운 곳과 어려운 곳에 경계를 긋고 영역의 제한을 두지는 않았다. 때로는 인내심을 발휘하면서 조금씩 천천히 나아가기도 했다.



시간이 한참 흘러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어린 시절부터 사랑해 마지않았던 독서가 나에게 있어서 부모님의 관심과 애정에 대한 대체애착 대상이었다는 것이다. 할부로 집안에 들이는 과정 중에 어김없이 있었던 불화를 딛고 그 시절 유행한 세계명작선집과 위인전을 완독한 후, 아버지가 젊은 시절부터 소장했던 몇 안 되는 책들을 이해하는 만큼 다 읽어 내려갔다. 그러고도 채워지지 않는 독서에 대한 갈애는 틈틈이 헌책방에서 뽀얀 먼지를 털어 내며 구입했던 몇백 원짜리 책들로 채워야 했다. 독서는 부모의 전폭적인 지지 없이 스스로 존재 가치를 찾아야 하는 어린 나에게 위안도 주고 해답도 줄 것 같았다. 앞이 잘 안 보이는 의문투성이의 막막함 속에서 나는 책을 통해 길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여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아쉬운 면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그 시절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은 다만 내가 선택할 수 있어 보이는 유일한 탈출구였기 때문이다.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어서 반드시 겪어 봐야 알 수 있는 면도 분명히 있다. 흔히 말하는 이론과 실제의 법칙이다. 둘은 확실히 분리되어 있지만 효과가 제대로 나는 것은 그 둘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을 때이다. 서로의 단점을 상호보완하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선순환적 관계가 되어야 한다. 때로는 어떤 문장이 발휘하는 힘으로 삶이 움직이기도 하고, 또 다른 움직임의 디딤돌 역할을 할 새로운 문장을 찾기도 한다. 또한 위선적이지 않은, 겉핥기식이 아닌, 진정성 있는 독서는 애정한 만큼의 애정을 다시 돌려준다. 그것은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실질적인 힘의 원천이 되기도 하고, 흔들림이 일상인 환경에서도 어느 정도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정서의 기반이 되기도 한다. 가끔 보석이에게 엄마를 구성하는 요소 중에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하는 것 중의 하나가 독서라고 이야기하지만, 보석이는 그것을 더 많은 독서를 종용하는 잔소리쯤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 그래도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한 가지 주제를 정해 책을 읽고 가족끼리 토론했던 경험과,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엄마와 주고받으며 릴레이 소설 쓰기를 했던 기억은 소중하게 간직하리라 생각한다.


어린 시절 보석이에게 읽기는 무엇이었을까. 태어날 때부터 문자보다 멀티미디어가 익숙한 환경이라, ‘읽기’가 이전 세대와는 다른 식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어도 될 수 있으면 아이 때부터 문자와 친해지게 하려고 집안 곳곳에 책을 구비해 놓고 독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오히려 책을 멀리하며 반항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리고 읽는 속도도 상당히 빨라서 숙독이 가능한 지 의문이 들 때도 있었다. 가끔 사람들이 텍스트를 ‘읽는’ 건지 ‘보는’ 건지 알 수 없을 때면, ‘읽기’는 정보를 습득하는 과정이 아니라 찬찬히 생각하면서 들여다보는 일이라 생각하는 나로서는 적잖이 당황스럽기도 하다. 읽기 능력은 무엇보다도 사고의 구조를 만들기 위한 능력이라, 빠른 매체 변환의 시대 속에서도 중요성은 오히려 더 강조되고 있다. 읽기가 사고 구조의 네트워크를 만들게 하려면 짧은 글들만 읽고 금방 잊어버리는 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복잡계에 속하므로 그런 현상들을 매번 간명하게 끊어내는 방식으로만 이해한다면 복잡한 사람들의 마음과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이루는 사회의 구조를 단편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



요즘 같은 시대에 누가 책을 보냐는, 텍스트는 낡은 미디어에 불과하다는, 어버이날 자녀에게 받는 선물로 책을 가장 싫어하는, 문자 읽기가 주로 업무를 수행하는 도구로만 활용되는 시대이지만, 예전에 내가 독서를 시작하게 된 계기처럼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찾아내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 복잡 다단한 모순적 현상을 대할 때마다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의문들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무엇보다도 그런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나 자신과 주변부를 이해하기 위해 ‘읽기’는 계속될 것이다. 더 나아가 점점 쇠퇴해 가는 기억력에 대한 보조적 수단으로, 읽어 내려간 것들의 정리와 숙고를 위한 최적의 방법으로, ‘이해’라는 이론을 ‘실제’의 세계로 옮기는 방식으로서의 ‘쓰기’도 이어갈 것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지속적으로 읽고 쓰는 사람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흔들릴 때도 중심추 역할을 하는 뿌리를 지상에 조금씩이나마 내리면서 흔들린다. 보석이의 읽기/쓰기와 나의 읽기/쓰기는 동기나 의미, 방식은 조금씩 다를 수 있어도 흔들림 많은 세상에서 보다 깊고 넓은 뿌리를 내리기 위한 중요한 두 축으로 작용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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