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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을 다한다는 말의 허상

수치화, 정량화의 굴레를 인식하기

by 리좀

"외적 지배기구의 소멸은 강제구조의 제거로 이어지지 않고, 다만 자유와 강제의 통합을 가져올 뿐이다. 성과 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 자본주의 시스템은 더욱 가속화된 발전을 위해 타자에 의한 착취에서 자기 착취로 전환한다 " 한병철 『피로사회』 中에서


언젠가 보석이와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학교 시험성적의 결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최선을 다한 결과라면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러자 보석이는 ‘최선’이라는 것은 실제 하지 않는다고 반박하며 최선을 다한다는 말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그제까지 기운 없는 표정으로 자신의 성적에 대해 이야기하던 보석이는 대뜸 목소리를 높이며 ‘최선 논쟁’에 열을 올렸다. 처음에는 화제를 돌리고 싶어 하는 것인가 라는 생각을 했지만, 정교하고 길게 이어지는 자신만의 ‘최선’에 관한 개념설명에 대해 천천히 귀 기울여 들어 보았다. 일단, 최선이라는 것은 사람마다 기준이 달라서 어디까지가 최선인지 아무도 정할 수 없으며, 개인적으로 ‘이것이 최선이다’라고 해도 기준점이 없으므로 허상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최선이라는 말은 어떻게 보면 ‘조금 더’의 연속적 표현이라 끝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만일 최선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천상계에 속하며 지상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까지 했다. 너무나 흔하게, 아무렇지 않게 쓰는 최선이라는 말에 보석이가 이토록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을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나는 보석이에게 ‘최선’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기로 했다.



우리 주변에는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갖가지 기록들이 깨지고 또 깨지는 이야기들 속에서 끊임없이 도전정신을 북돋우거나 부추기는 일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수치화, 정량화할 수 있는 것들은 그렇게 최고, 최대, 최초라는 타이틀을 달고 선망의 대상으로 떠오른다. 그렇다면 수치화할 수 있는 것들은 가치를 반영하는데 더 효율적인가? 어떤 활동에 특정화된 점수 부여 시스템이 도입되면 참가자들은 본래 의도했던 목표의 경험에 집중하는 대신 점수를 획득하는 데만 몰두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가치 점유’라고 불리는 이런 현상은 어떤 활동에 기울인 과정이라는 본래 가치가 들어설 자리를 숫자가 대신 차지하게 만든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마이클 이스터는 그의 저서 가짜 결핍(scarcity brain)에서 우리가 현실을 피해 수치화된 결핍의 고리에 빠져드는 이유 중 하나가 불편함과 불안함을 유발하는 불확실성을 없애기 위해서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어쩌면 최선이라는 표현도 저마다 가지고 있는 측정 불가능한 능력(잠재력을 포함한)을 가시적인 영역으로 이동시키려는 의도가 포함된 말인지도 모른다. ‘최선’을 이루는 요소는 한두 가지가 아니며 한 번 설정되면 끝나는 문제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한다면 더 잘할 수도 있겠지만 딱히 그 과정을 또 거치고 싶지 않고, 다소간의 아쉬움이나 후회가 있더라도 감수할 수밖에 없는 문제이다' 정도로 최선이라는 말을 대체할 수 있을까? 여기서 만일 '후회'의 감정에 집착한다면 '최선'이라는 가상에 힘을 더 실어주는 모양새가 되기 때문에 보석이는 '후회'도 허상에 집착하는 소모적인 감정이라고 일괄했다. 하지만 나는 '후회'는 반성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필요할 수도 있는 감정이라고 응수했다. 세계를 이해하고 사유할 때 사용하는 정신적 도구로서 '개념'은 구체적 경험이나 대상을 넘어, 여러 사례에서 공통적인 성질을 추상화하여 형성된다. 그리고 개인의 사회화 과정에서 형성한 개념은 사회적 소통을 위한 매개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추상화된 개념은 많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더라도 서로 일치할 수는 없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최선'이라는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이데아처럼 절대적이고 고유한 개념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각각의 크고 작은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서 차이를 인식하고 조율하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학교를 비롯한 여러 집단에서 숱하게 들었을 말일 텐데 보석이에게 왜 '최선'이라는 말이 그토록 부정적인 느낌으로 다가왔을까?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만연한 성과주의의 압박 속에서 반드시 비교될 수밖에 없는 성과들에 대한 원인을 개인(의 노력)에게 일방적으로 귀속시키는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성과에 대한 평가를 논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은 누구나 좀 더 노력을 기울인다면 더 좋은 성과가 있을 것이라고, 노력하지 않아서 낮은 성과가 나오는 것이라고 천편일률적으로 생각하고 기대한다. 그런 메시지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 자진해서 스스로를 다그치는 일종의 자기 검열적 작용을 하게 만든다. 규율사회에서 통제사회로 넘어오면서 숫자는 성장이라는 무한한 요구를 내면화하기 위한 최적의 도구가 되었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 낸 숫자에 인간이 스스로 종속되는 것이다. 세상에는 숫자로 판단하거나 평가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있는데, 어떻게든 편의상 숫자로 줄 세우려고 한 결과와 그러한 결과가 만들어 낸 구조에 갇혀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보석이는 아마 주변에서 통용되는 언어에서 의사소통 이상의 의미를 감지했을 것이다. 실제로 언어는 행동을 지시하고 규율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최선'이라는 단어뿐 아니라 "혁신”, “성장”, “긍정”, “열정” 등의 무해할 것 같은 말도 비슷한 맥락으로 해석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성과”라는 단어는 단지 '이루어낸 결실'이라는 사전적 의미뿐 아니라, 평가 시스템, 점수화, 보상·징계 메커니즘과 연결되어 통제의 기계적 배치를 구성하며 소통·기호를 넘어서 명령·기호로 작동하는 것이다. 이 배치 안에서 언어는 주체의 행위, 감정, 자기 인식을 조직하게 된다. 나는 '최선'이라는 단어의 일원화된 개념에 대해 반기를 들며 자신만의 생각으로 재해석했던 보석이의 어릴 적 마음이 퇴색하지 않기를 바란다. 수치화, 정량화된 구조 속에서 불확실성과 불안정함을 해소하고 싶은 마음을 어느 정도 극복해 가면서 숫자가 가리키는 가치기준에 세차게 휩쓸려가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힘들겠지만 자신만의 가치 기준을 스스로 만들어 가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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