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존재는 존재로서 빛난다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이것이 언명되어야 하고 사유되어야 한다. 선물을 주듯 존재론적 차이를 통해 존재가 말 걸어오고 비로소 사유가 시작된다. 요컨대 (존재자와 존재의) 차이가 사유를 존재에 가 닿게 하는 것이다.” - 서동욱, 『차이와 반복의 사상 들뢰즈와 하이데거』中에서 -
많은 부모들은 자신이 온전히 살아 내지 못한 시간 속의 경험들에 대한 감정을 오롯이 모아 자기만의 상을 만들고 틀을 형성해서 자신과 가장 밀접한 대상에게 투사한다. 그 틀에 자신이 가장 아끼는 사람이 부합하도록 노력하는 삶이 자신에게 주어진 진정한 삶이라고 생각하면서 두 번째 곡해를 진행한다. 그것은 삶의 밀도나 삶에 쏟아부은 에너지의 강도와는 별개의 문제이다. 빽빽하고 치열하게 살았으나 불안 가득한 상처만 남은 사람도 있고, 반동적 우울에 시달리는 사람도 있다. 지나고 보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양육자가 행복하지 않으면 피양육자는 필요로 하는, 혹은 지나치게 많이 요구되는 인내심이 가져다줄 미래의 삶에 대한 희망을 볼 수 없다는 점이다. 자식을 위해서 그렇게까지 하냐는 관점과 자식을 위해서 왜 더 많이 하지 않느냐는 관점 사이에서 가까스로 균형을 잡는 데 힘을 쏟느라 정작 보석이에게 비칠 내 모습은 잘 돌아보지 못하고 달려온 것 같다. 보석이를 통해 내 어린 시절에 대한 정서적 궤도를 수정하고, 재정렬할 수 있었지만 그 일에는 일정량의 고통이 뒤따랐다. 결과적으로는 어려운 작업을 해낸 것이었으나, 그 과정이 보석이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서는 뒤늦게야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행복하지 않은 힘든 날들을 겪어 내면 언젠가는 행복한 날이 오긴 오는 건가요?’
‘그럼, 반드시 온단다. 내가 너를 키우면서 만감이 교차하는 행복을 느끼는 것처럼 너도 그런 날을 맞이하게 될 거야.’
‘그런데, 웬일인지.... 엄마의 얼굴은 힘들어 보이기만 하네요.’
보석이와 나는 한 번도 이렇게 대화해 본 적은 없지만 늘 이 문제를 두고 무언의 대화를 시도해 온 것만 같다. 보석이가 눈빛으로 나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던 것을 나는 잘 알아채지 못했다. 보석이와 나 사이에 가장 중요한 문제이면서도 어떤 식으로든 표현하기가 어려운 문제라 앞으로도 이런 대화를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말로 표현하기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고, 무엇보다 행동으로, 삶 자체로 증명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보석이를 만나기 전에 이미 오랫동안 품어온, 해석하기 어려운 상처를 치유하고, 삶에 대한 경직성을 풀어놓고 있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보석이를 만난 후에야, 보석이의 도움을 받아 비로소 나는 이전보다 훨씬 유연하고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보석이가 아니었으면 나는 내 정서의 상당 부분을 왜곡되고 굳어 있는 채로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모순적인 이야기 같지만, 확실한 것은 보석이로 인한 첫 번째 수혜자가 나이고, 두 번째 수혜자가 보석이인 관계로, 보석이가 다소 감내해야 할 부분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별한 역할을 하지 않고도 존재 그 자체로 다른 존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존재는 부모가 아니라 자식일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유이다.
보석이는 크게 의식하지 못한 채로 쌓아 둔 내 마음 주위의 성벽을 인식하게 했다. 그 성벽은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한 방패막 역할을 했을 수도 있지만 사랑이 들어오는 것도 막았다. 한 번도 스스로 무장해 본 적 없는 무해한 존재를 만나기 전까지 해제될 수 없는 성벽일 것이다. 보석이는 이런 의미에서도 미처 기대하지 못한 선물과 같았다. 보석이로 인해 영향받은 나의 변화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겠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크게 다가오는 마음은 ‘감사’이다. 세상만물의 신에게 보석이를 만나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되뇔 때면, 저절로 보석이도 이런 마음을 언젠가는 느낄 수 있게 되기를 바라게 된다. 누구보다 삶을 깊이 사랑하기 위해서 평생 동안 죽음을 연구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말처럼 감사하는 마음은 일종의 역능인 것 같다. 어디서부터 생겨나는지 알 수 없는 힘이 생기고 쉽게 좌절하고 쓰러지지 않게 만든다. 세상의 많은 부모들이 자식으로 인해 힘을 얻어 고달픈 시절을 견디면서도 자식이 없었으면 힘들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이유와 같을 것이다. 사랑과 감사가 어떻게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지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 미숙하다. 많은 경험과 오랜 시간이 미숙함을 상쇄시키는 경향이 있지만 배움이 없으면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배우기 위해서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모르는지 먼저 알아야 하고, 하나의 배움을 다른 배움과 유연하게 이어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진정한 배움은 생각과 마음을 동시에 움직인다. 굳은 생각과 닫힌 마음을 강한 힘으로 밀어붙여 자유롭게 흐르게 한다. 배움이 주는 또 다른 선물은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만들어 주고, 들리지 않던 소리를 듣게 해 주는 것이다. 나는 이제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의 생김새와 이름이 눈과 귀에 들어오고, 계절의 변화가 마음속 깊숙이 들어오는 것을 경험한다. 매일 들르는 장소도 어제와는 다른 곳임을 느끼게 되고, 자주 만나는 사람도 이전과는 조금씩 달라져 있음을 알아챌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말할 때는 상대방의 표정을 통해 상호작용하는 것을 느끼고, 상대방이 말할 때는 그 상황 속으로 기꺼이 함께 들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듣는다. 겉에서 보기에는 피곤하고 골치 아플 것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제 감사하게도 그것은 겉에서만 보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에게 있어 보석이는 이제 어엿한 성인이 되어 타지에서 제 몫을 하며 씩씩하게 생활하고 있는 대학생 딸이기도 하지만, 2.43kg의 저체중아로 태어나 내 마음을 졸이게 했던 순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길고 다채로운 파노라마이다. 그 파노라마는 때로 하나의 온전한 힘으로 접히면서 응축되기도 하고, 길게 펼쳐지며 많은 이야기를 발산하기도 한다. 그것은 과거의 이야기이면서,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기대와 설렘까지 포함하고 있다. 반짝이는 것들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담고 있어서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가득 차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보석이라는 파노라마는 빈 구석이 많았고, 때론 어두운 구석도 있었던 나의 마음을 빈틈없이 채우면서도 그 속에서 나를 자유롭게 유영하게 만든다. 그 안에는 함께 했던 수많은 사람과 사건이 공존하고 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모든 (비)인간 존재들이 나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보석이와 함께 진정한 존재가 되어 자신의 빛을 발하기를, 서로의 진정한 존재를 만들어 주기를 바라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