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보석이에게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보석이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존재이다. 보석이를 뱃속에 품고 있던 시간에는 나와 보석이의 근접거리가 마이너스였고, 보석이가 세상에 나와서도 서로의 자장 밖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스무 해를 지나고 나서 이제 보석이와 나는 우리가 사는 땅에서 서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사건을 만나게 되자, 비로소 내게 있어 보석이는 실체라기보다 사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석이는 지금 내 눈앞에 보이지 않지만 보석이와 함께 한 많은 일들은 지금도 곁에서 보석이를 생생하게 현현해 내고 있다. 무수한 사건을 구성해 내는 작업으로서의 글쓰기는 보석이라는 실체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길이었다. 성에 차지 않는 능력 때문에 성기고 조야하다는 느낌의 압박을 늘 받지만, 그 압박을 넘어설 만큼 글쓰기는 나에게 최적의, 이제는 거의 유일한 방법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실체와 의미가 만나는 표면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분주히 일어나지만, 구성된 하나의 사건은 또 다른 사건과 연쇄적으로 이어져 확장된 연결고리를 만들어냈다. 보석이라는 일생일대의 가장 큰 마주침이 결코 단선적일 수 없는 이유일 것이다. 나는 보석이를 통해 나의 어린 시절을 횡단하면서 그 속에서 함께 사건을 만들어 냈던 또 다른 가족들과의 관계를 새롭게 구성하게 되었다. 과거를 재구성한다는 것은 동시에 현재와 미래를 함께 바꾸어 놓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주침의 강도가 클수록, 실체가 사건을 통해 새롭게 구성될수록, 사건이 던지는 의미의 파장은 더 크게 일어난다. 근접거리에서 시작된 사건의 파장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여러 갈래로 퍼져 나갔다. 나의 보석이를 통해 세상의 많은 보석이들에게까지 생각이 미치게 된 것이다.
보석이는 자기 자신일 수도 있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비인간 존재일 수도 있다. 현재가 아닌 과거에 존재할 수도 있고 미래에 존재할 수도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 멀리 떨어져 있을 수도 있고, 가장 가까이에서 보이지 않는 듯이 있을 수도 있다. 하나의 보석이 제 빛을 내기 위해서는 주변과의 많은 상호작용이 필요할 것이다. 얼마나 많은 보석들이 있는 그대로의 반짝임을 드러내지 못하고 빛을 잃어갈까. 얼마나 많은 보석들이 자신의 빛을 잃은 채 다른 반짝임을 좇으며 헤매일까. 어찌 보면 세상의 모든 이는 다 보석이고, 그 주변엔 반드시 보석이 있을 것이다. 하나의 보석은 그 주변의 보석이 어떤 의미로 만들어가냐에 따라 반짝거릴 수도 있고 빛을 잃어 갈 수도 있다. 자신의 보석을 밝혀줄 화려한 조명을 설치하는 것이 아니라 보석 그 자체로 빛나게 해 주려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자신의 빛을 되찾을 수도 있다.
효율, 관리, 성과의 언어로는 독해할 수 없는 사건의 과정이 개인적 폐쇄회로 속에 갇혀 버리면, 흐름으로서의 사건의 물길이 막혀 버리고 돌봄이나 양육의 기꺼움은 의미부여를 받지 못한 채 비가시적 수고로움으로 바뀌어 버리기도 한다. 구조적 취약성이라는 한계로 인해 억압되거나 은폐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다 해도 사건은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 다분히 불리한 상황이긴 하지만 예측 불가능한 리듬을 끌어안으며 삶을 관리하기보다 경험하려는 용기가 필요해 보인다. 얼핏 미약해 보이는, 그러나 무엇보다 결정적인 하나의 미시적 용기가 자발적 자기 관리와 효율에 길들여진 몸을 풀어주는 힘으로 작용하면, 잃었던 자신의 빛과 또 다른 보석의 빛을 동시에 발하게 하는 연쇄작용으로 확장될 수 있다. 나의 보석이, 그리고 다른 모든 보석이들이 자신을 둘러싼 여러 사건들을 생성하며 또 다른 보석을 만들어 내는 과정 속에서 지금보다 더 빛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