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계속해서 만들어 가야 할 사랑
“나는 벗에게 화가 났다.
화를 털어놓으니, 분노는 사라졌다.
나는 원수에게 화가 났다.
그땐 말하지 않았으므로, 분노는 자랐다.”
- 윌리엄 블레이크, 『A Poison Tree』 (독나무) 中에서 -
“아니, 엄마는 화가 많아”
엄마 목소리가 좀 큰 편이지?라고 찔리는 구석이 있어서 지레 소극적으로 물어볼 때마다 보석이가 하는 말이다. 그리고, 보석이를 향한 나의 논리적 설득이 거의 먹혀들 무렵, 엄마의 약점을 잘 알고 있는 보석이의 복수로 인해 감정이 긁혀서, 내 언성이 높아지는 것으로 대화가 마무리될 때 듣는 말이다. 과거에는 남자들에게 주로 쓰였던 나의 '욱하는 성미'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때가 언제일까 생각해 보면 아주 어린 시절부터라고는 할 수 없는 것 같다.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상황을 만날 때 느꼈던 첫 번째 감정은 분노가 아니라, 우선적인 '좌절'과 뒤따라오는 '우울',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불안' 같은 것이었다. 억울하지만 대응할 수 있는 마땅한 방법이 없어 보일 때 좌절감이 들고, 그에 따른 무력감으로 우울감이 들다가, 또다시 비슷한 상황을 맞닥뜨릴까 두려워 불안이 찾아온다. 반대급부적으로는 비슷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적응'이라는 과정을 거치기도 한다. 여기서 말하는 '적응'은 부당한 상황 뒤에 이어지는 부정적인 감정을 회피하기 위한 일종의 자기 방어기제일 테지만, 그다지 바람직하지는 않아 보인다. 부당하다는 인식과 함께 붙어 있던 감정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그것을 차차 희석하고 합리화해서 받아들이며 내면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래의 감정은 결코 없어지지 않고 시간차를 두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표출되기 십상이다.
위와 같은 과정은 부당함을 인식하면서 들었던 최초의 감정이 제대로 발현되지 못하고 다양하게 왜곡되는 방식을 보여준다. 흔하디 흔한 이런 현상이 나에게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기까지 많은 노력과 시간이 소요되었고, 그 어려운 알아차림에 한몫을 한 사람이 보석이다. 많은 양육자는 피양육자를 양육하면서 자신이 피양육자이던 시절을 오버랩시킨다. 그러면서 그 시절 자연스럽게 체화되었거나 아니면, 고이 덮어두었던 감정이 되살아나기도 한다. 양육자의 소양으로서 꼭 필요한 사랑은 본능적 가능성과 사회적 학습이라는 두 가지 면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 완성도가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날 때 중 하나가 바로 양육자를 경험하는 시기일 것이다. 결핍되거나, 왜곡되거나, 진정성 없는 사랑 속에서 자란 양육자는 그것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고스란히 자신의 피양육자에게 전달하기도 하지만, 다소간의 재조정 과정을 거쳐 수정해 나가기도 한다. 그리고, 그 재조정 과정에서 스스로 억압하거나 미화했던 감정들에 대한 인식이 생겨나기도 한다. 간단히 말하면, 한 번도 제대로 의심하지 않았던, 사랑이라고 믿고 살았던 것들에 대한 질문이 생겨나는 것이다.
너무 어려워서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는 사랑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들을 근원부터 흔들어야 할 때가 있다. 누군가 주었다고 생각한 사랑과 그 사람에게 받았다고 느낀 사랑은 결코 일치하지 않는다. 사랑은 존재와 존재 사이를 흐르며 다양한 울림으로 재전유된다. 때로는 보이지 않는 사랑을 담는 그릇인 형식이 매우 중요할 때가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N가지 방식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사랑은 그것에 대하여 왈가왈부해 온 인간의 역사만큼 복잡하고 다양하다. 부모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라 감히 의심할 수 없다는 정언적 문화에 힘입어, 오랜 시간 동안 부모의 사랑을 믿으며 살아왔는데, 어느 날 그런 부모에게서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의무였다는 말을 듣는 경우도 있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나는 갑자기 버려진 아이가 되어, 아무도 모르게 눈물로 방황했다. 내가 받은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면 지금 내가 보석이에게 주고 있는 사랑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지금 내 마음속에서 차오르는 이 감정과 그 감정을 자양분 삼아 힘든 줄도 모르고 기울이고 있는 나의 노력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부당한 것을 참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안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조직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단점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고, 가까운 지인들에게는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기도 했다. 시간이 좀 더 흐른 후에야 나의 과다한 분노 감정의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인정하기 쉽지 않았지만 굳게 믿어온 사랑에 대한 배신감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것은 은연중에 자각해 온, 그러다 결정적으로 뒤늦게 알게 된 부당한 처사에 대한 반발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분노의 근본 원인을 알게 되면 엉뚱한 방향으로 분노가 튀는 것을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다. 설령 잘 조절하지 못하더라도 빠르게 사과할 수 있는 용기도 생긴다. 그래도 여전히 숙제는 남는다. 나를 길러준 지나간 사랑, 혹은 사랑이 아닌 것에 대해 재정의하고, 흐트러진 관계도 재정비해야 한다. 그리고, 내 분노의 원인들에게 죄책감 없이, 설득력 있게 분노를 표현하면서 묵은 감정을 사그라뜨려야 한다.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나에게는 보석이가 길어 올려준 사랑의 우물이 있다. 과거가 현재를 구원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현재가 과거를 구출하기도 한다. 밑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이러한 구원의 힘이 발휘되기 위해서는 당사자의 결정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또한, 그동안 기울여 온 나의 노력이 빛을 발하지 못하더라도 결국에는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도 알고 있다. 사랑은 오랜 시간 동안 서서히 스며들기도 하고, 섬광처럼 일순간에 찾아오기도 하지만 좌충우돌을 불사하고 다듬어져야 하는 것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