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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 그 자체로 지지받기

절대적 가치와 비교 우위 속의 갈등

by 리좀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이는 타자가 욕망의 대상에 대한 열쇠를 쥐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욕망의 최초 대상이 타자에게 인정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 -자크 라캉 『에크리』 중에서 -


우리가 평소에 잘 쓰는 표현 중에 '남부럽지 않게~'라는 말이 있다. 이 표현에는 자신의 만족감에 대한 비교 기준이 확실히 설정되어 있다. 타인을 부러워하는 일차적인 심리가 있고, 타인이 자신을 부러워하는 정도에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욕망이 내재해 있다. 게다가 여기서 말하는 '정도'에 대한 한계는 스스로 설정하지 않으면 상한선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아이를 양육하는 과정에서도 이런 심리가 은연중에 포함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자식농사 결과물의 최종 기준선이 있을 테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세부적인 갖가지 기준선들이 척도로 작용할 것이다. 양육자가 이러한 시선으로 피양육자를 본다면 크고 작은 비교의 마음이 생겨날 수밖에 없고, 아무리 의식적으로 자제하더라도 비교의 심리가 표현될 수밖에 없다. 타인과의 끊임없는 비교 속에서 성장한 사람은 평생에 거쳐 자신의 삶을 비교 속에서 자리매김시킬 가능성이 높다. 자기 기준을 마련할 힘을 키우지 못했기 때문이고, 설령 자기 기준을 어느 정도 마련했다 해도 그에 대한 정서적 지지기반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비교하는 마음과 비교당하는 마음은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영향을 미치고 이어진다.


세상 누구와도 바꾸지 않을 소중한 아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바라보는 것에 대한 난관은 대부분 욕심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보석이에게 대단한 것을 줄 수는 없어도 한 가지 꼭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이 바로 다른 아이들과의 비교였다. 다른 사람이 굳이 비교하지 않아도 단체생활을 시작하는 시기부터 스스로 타인과의 비교를 경험하게 될 터였다. '왜 나는 주변 아이들과 이러저러한 부분에서 차이가 날까' 같은 의문과 고민도 벅찰 텐데, 자신에게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부모까지 이 문제에 대해 가세한다면 어려움이 더 커질 것이 뻔했다. 비교의 표현은 직접적이지 않아도 아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보석이가 초등학교 1학년일 때, 같은 반 아이 중 한 친구를 보석이 앞에서 지나가는 말로 무심코 칭찬한 적이 있었다. 무엇을 칭찬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보석이가 갑자기 길거리에서 대성통곡한 일은 잊을 수가 없다. 당혹감에 어쩔 줄 몰라하면서, 보석이를 다른 아이와 간접적으로라도 비교한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몇 시간 동안 보석이를 어르고 달랬다. 그때 보석이가 느꼈던 것은 아마 다소간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에 대해 언제나 절대적 지지를 해 주는 존재에 대한 배신감이 아니었을까.


때로 비교는 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신뢰를 갉아먹는 작용을 하기도 한다. 여기서 비교는 다른 집 아이들과의 비교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형제자매들 간의 비교, 혹은 어린 시절 양육자와의 비교까지 포함된다. 그리고, 비교에 대한 표현은 비난과 질책 같은 극부정적인 것 외에도 다른 비교군에 대한 간접적인 부러움의 표현, 혹은 비언어적 표현까지 포함된다. 환경과 개별성을 인정하지 않는 가차 없는 비교를 어떤 사람은 자아에 대한 폭력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비교의 표현은 자신과 유대적 지지 관계에 있는 대상과의 안정적 애착 형성을 방해하고, 자기 효능감을 떨어뜨리며, 정서적 회복 탄력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과도한 경쟁과 성장주의 문화도 이러한 '비교 표현'에 대한 둔감성에 일정 부분 역할을 했을 것이다. 끊임없는 비교경쟁우위에 대한 재촉 속에 난무하는 시대적 불안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일 지도 모른다. 양육자를 포함한 세상은 너무 빠른 속도로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고, 스스로 마련하는 근거가 될 안정적 지지 기반은 어디에도 없어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비교의 부작용은 자신 안에서도 일어난다. 자기의 과오를 되돌아보고 바로잡으면서 변화를 도모하는 자아성찰적 비교가 아니라, 과거의 자신, 혹은 현재의 자신을 근본적으로 부족한 존재로서 상정하여 외부의 강요 대신 끊임없이 스스로를 통제하는 자기 검열적 대상으로 자신을 비교한다. 이 과정에서의 실패에 대한 원인을 오로지 자신의 노력 부족으로 귀결시키고, 그 실패한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기도 한다. 전교권 성적을 유지하던 학생이 한 번의 실수로 밀린 등수를 비관하는 경우나 사업에 실패하여 기존의 부유한 생활수준을 유지하지 못하게 된 사람들이 절망하는 경우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다. 안팎으로 횡행하는 비교질에 숨트일 공간이 없어져버린 사람들 중 일부는 자기 파괴적 일탈을 시도하기도 한다. 체화된 긴장과 불안은 자신은 물론 가장 가까운 관계에까지 전염되고, 세상에서 가장 친밀해야 할 관계는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점점 더 왜곡되는 불행을 겪는다.


보석이에 대한 비교 표현에 유의하기 위해서는 보석이를 아예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지 않는 마음을 가져야 했다. 자식이 좀 더 잘 되기 바라는 마음,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채워가기 바라는 마음의 기준이 정량화가 쉬운 비교로 정해진다면 일견 마음을 정하기엔 손쉬워 보이기는 하나 그로 인해 놓치는 부분도 많을 것이다. 그 놓치는 부분이 나중에는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로 삶 전체를 지배할 수도 있다. 다른 아이들이 이뤄가는 것들과 비교하면서 평가하지 않는 마음은 너무 당연한 마음이지만 그렇다고 쉽지만은 않다. 쉽지 않은 노력을 하는 엄마를 보면서 보석이도 엄마아빠를 다른 부모들과 비교하지 않는, 역시 쉽지 않은 과정을 겪었으리라 짐작했다. 다른 부모들과 (비교 되게) 부족했겠지만 나의 부모가 해줄 수 있는 나름 최선이라는 것을 느끼면서 감내해야 했을 것이다. 한 번도 비슷한 표현을 들어보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삶의 가치에 대한 자신의 기준을 만들어가는데 고군분투하고 있는 보석이의 모습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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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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