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자로서의 삶을 완성한다는 것
“행위자는 언제나 행위하는 다른 존재들 사이에서,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그는 단순한 ‘실행자’ 일뿐만 아니라 동시에 고통받는 자다. 행하고 고통받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中에서
수년 전에 집 근처 공공도서관에서 운영했던 문학평론 글쓰기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다. 첫날 수업시간에 각자 자기소개를 하며 수업에 참여하게 된 계기를 간단히 이야기했는데, 그중 한 참여자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자신의 아이들이 책 읽기와 글쓰기를 멀리 해서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불안에 가득한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지만 그에 대한 설명은 하나도 없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아이들 얘기만 하고 마무리했던 것 같다. 일단 자신을 소개하는 건지 자신의 아이들을 소개하는 건지 자기소개의 주체를 잘 알지 못했고, 자신이 문학평론 수업을 듣는 것이 초등학생 아이들이 독서를 하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뚜렷이 기억에 남는 것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아이들 때문에 근심으로 가득했던 얼굴과 바로 그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수업에 자주 결석했던 것뿐이었다. 그때 보석이도 같은 초등학생이었기에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늦잠 자는 아이를 깨워 지각하지 않고 학교에 보내는 것부터 시작해 학교에서 수업에 참여하고,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를 보는 모든 순간까지 학교 밖에서 자녀와 함께 하는 양육자들이 있다.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학교수업을 마치고 학원에 갔다 집에 돌아와 못다 한 숙제를 하는 순간까지 몸만 살짝 떨어져 있고 실제로는 같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전전긍긍형 부모들이 많다. 자식이 부모로부터 서서히 분리되는 것보다 부모가 자식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더 어려워하는 경우이다. 아직 어리고, 뭘 모르고, 진지하지 않다는 이유 앞에서는 자식의 모든 마음자세와 행동은 미흡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이때만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고해서 비교해 보는 것조차 계획에 없다. 아직 아이들이지만 어른의 기준에 맞춰서 행동하고 사고해야 하는 어려움을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미 탄생했지만 아직 탄생하지 않은 인간이 있고, 사회적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한 또 다른 인간은 사적 영역 속에서 자신을 투영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공적 인간을 탄생시키려고 분투 중이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행위'는 '노동'이나 '작업'과는 달리 인간이 말하고 행동함으로써 자신을 드러내는 고유한 활동으로, 타인과 함께 있을 때만 가능하며, 세계 속에서 자기 존재를 드러내고 새로운 시작을 여는 능력을 말한다. 그리고 사회적, 정치적 삶의 핵심으로, 자유와 다양성, 개별성을 실현하는 과정이다. 좌절된 '행위'의 욕구는 가장 실현하기 쉬운 밀접한 대상으로 방향을 틀며, 그 대상과 가장 밀착되어 있을수록 실현하기 쉬워진다. 교육열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했던 경제적 성장 덕분에 고학력을 이룰 수는 있었지만 지금은 상대적으로 완화되었을지언정 그 시절엔 상대적으로 견고했던 유리천장과 구조적인 육아부담 때문에 좌절된 '행위'에 대한 열망은 다양한 방식으로 반작용을 낳고 있다. 돌이켜 보면 소와 논밭을 다 팔아서라도 자식을 교육시켰던 더 윗세대들의 열망도 별다른 부작용 없이 빛을 발한 것일까 싶다. 모르긴 해도 맹목적으로 한 방향을 향해 우르르 몰려 간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누군가의 무게중심이 온전히 자신에게 쏠려 있는 느낌을 받는다면 자신의 인생 위에 다른 사람의 인생까지 얹어서 살고 있는 것 같은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대나 열망이 없는 지원이나 후원이 있을 수 있을까, 보상이 없는 노력을 아낌없이 기울일 수 있을까. 자식의 학업성취나 취업 같은 것에 기뻐하면서도 자신의 성취와 연관 짓지 않을 수 있을까. 자식의 성취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마치 자기 인생이 패배한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 자식에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투영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그 열정과 맹목성에 놀라면서, 그 안에 감추어진 감정을 엿보고 동시에 나에게도 스며있을지 모를 감정에 대해 관찰하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는 일이다.
반대로 본인은 고생고생 해서라도 자식이 잘 되면 그저 기뻐하셨던 부모의 마음에서 자유로울 수는 있을까. 수십 년을 사는 동안 제대로 된 여행 한 번 해 본 적 없는 사람이 어쩌다 친구들과 함께 한 여행지에서 가는 곳마다 마음속으로 자식을 소환한다면 그 사람은 온전한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일까. 자신이 원하는 물건 하나 마음 편하게 사지 못하는 것을 그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미화할 수 있을까. 치매에 걸린 부모를 정성으로 돌보면서 자기 자식은 나중에 자신을 돌보지 않았으면 하고 순수하게 바랄 수 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관계 속에서 우리는 언제쯤 죄책감이나 부담감 없이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있을까. 어떤 물리적인 거리와 심리적인 거리의 완급 조절이 이토록 밀접한 관계에 대해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까.
보석이와 함께 하는 시간 동안 위와 같은 문제는 늘 나에게 있어 화두였다. 경제적, 심정적으로 가능한 범위 내에서 전폭적으로 보석이의 독립을 위한 기반을 지원하면서도, 그 결과에서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 있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지 고민했다. 동시에 나는 완전히 독립했다고 여겼지만 자식들에게서 독립을 실현하기 꺼려하는 나의 부모와의 관계도 재정립하는 일을 병행할 수밖에 없었다. 부모를 독립시키면서 동시에 자식을 독립시켜야 했다. 왜냐 하면 그 둘은 서로 맞물려 있기 때문에 한쪽만 성공한다고 해서 이룰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한쪽이 다른 한쪽에 일방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돌봄 관계와는 다른 문제였다. 또한, 민감하고 복잡하기는 하지만 애정에 손상을 가하는 것과는 다른 결의 문제였다. 그리고, 어느 정도 이루었다고 자신하는 순간에도 여전히 진행 중에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