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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을 Apr 04. 2023

세계 첫 부조리 감별사, 카뮈에게

<이방인> 알베르 카뮈(민음사)

"천천히 가면 일사병에 걸리기 쉽고 너무 빨리 가면 땀을 많이 흘려서 성당 안에 들어가선 오한이 나요." 그 말이 옳았다. 빠져나갈 길이 없는 것이었다.

<이방인>알베르 카뮈(민음사)


"엄마, 교실에서 혼자다녀요. 알아요?" 새학기가 시작된지 한 달이 채 안되어가는 오늘은 딸아이의 생일입니다. 딸아이는 방금 전에 서울대입구역에 친구 네명과 함께 자신의 생일 파티를 끝내고 선물을 한아름 안고 돌아왔어요. 단짝과 다른 반이 되어 헤매는 어린 영혼의 마음을 모르지 않지만 방금 친구들과 헤어져 돌아온 아이의 말에서 허망한 소비가 떠올라 얼굴이 굳습니다. 친구가 많지만 반에서 함께 할 단짝이 없으면 외롭고 혼자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당신이 말한 부조리일까요?


늦은 출근을 하려는 남편에게 갈아입을 옷들을 전해주고 책상에 앉았어요. 곧이어 문소리가 날 줄 알았지만 문소리가 나지 않았어요. 남편의 방에 들어가봅니다. 남편은 노트북을 한팔에 껴앉고 출근복 그대로 바닥에 누워있었습니다. 남편을 사이에 두고 노트북과 나란히 누워봅니다. 방문 앞을 나서지 못하고 누워버린 고단함에도 부는 쌓이지 않고 허덕이는 삶이 당신이 말한 부조리일까요?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선 앨리스가 계속 뛰고 있는 붉은 여왕에게 묻습니다 " 계속 뛰는데 왜 제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나요?" 붉은 여왕은 대답하죠. "여기서는 힘껏 달려야 제자리야. 나무를 벗어나려면 지금보다 두 배는 더 뛰어야 해"라고. 제자리 뛰기라니, 벗어나려면 두 배로 뛰라니. 붉은 여왕의 부조리가 가족을 먹여 살릴 노트북과 먹여 살려야 할 가족을 양 옆으로 겨안고 있는 남편의 비애와 닮아 있습니다.


그리고 뫼르소, 뫼르소에겐 통념의 어른과 다른 어른이 그 안에 들어 있어요. 바로 그 점이 그가 부조리한 세계에 눈 뜨게 된 근본적인 부조리일가 아닐까요? 그의 행동들은 어린아이 같은 데가 있어요. 세계의 관습과 배타성에 적응하지 못하는 순수함과 천진함이. 아이들은 엄마의 장례식에서 단맛을 즐길 수 있고, 내일의 놀음을 생각할 수 있죠. 장례식의 무거운 분위기에 젖어들기 어렵고, 관습적인 형식들에 무심할 수밖에 없어요. 많은 사람들의 시선에 부담을 느낄 테고요.


이런 이유로 마리가 "결혼할 마음이 있"느냐고 물을 때 뫼르소가 "엄마한테 물어보고"라고 해도 이상할 것 같지 않았어요. 영혼의 순도만 보면 뫼르소가 법정에 섰을 때는 최초로 '촉법 청년'을 적용해야 하는 거 아닐까 생각했고요. 이런 그가 한편으로는 사나이이기도 합니다.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는 남자(제가 좋아하는 덕목입니다)이자 편견 없이 친구를 사귈 줄 알기에 포주로 알려졌지만 표면상 '창고 관리인'인 레몽과 친구가 됩니다.


세계와 나의 경계를 모르고, 타인의 통념을 모르는 뫼르소이기에 법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미워한다고 생각하니 울고 싶어집니다. 근본적으로 뫼로소는 타인들의 시선, 가차없이 하강하는 태양빛을 겁내고 있거든요. 뜨겁게 주목받다는 것은 그에게 도저히 적응할 수 없는 공포예요. 아마도 세계와 나, 또 나와 나의 피할수 없는 진지한 대면이 이뤄져야 하기 때문이겠죠. 세상이 살아갈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남들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뫼르소가 세상과 이렇게 압축적으로 맞딱드리게 되다니 가혹합니다.


뫼르소가 무관심하고 태연하고 단순한 듯보이지만 그는 알고 있어요.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특히 무엇을 좋아하지 않는지. 다만 이런 자신을 일상에서 확인받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겉돌았겠죠. 자유를 박탈당하고 자신과 세계가 대립하게 되자 비로소 깨닫습니다. 자신이 옳다는 것을. 죽음을 앞두고 가장 약해졌을 시간, 뫼로소는 어떤 도움도 필요없이,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가 이해하는 자신의 삶과 마주합니다. 황혼에 인생을 시작한 시점으로 골랐던 어머니처럼 뫼로소도 자기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서야 다시 시작할 마음으로 타오릅니다.


"엄마가 왜 한 생애가 다 끝나갈 때 '약혼자'를 만들어 가졌는지, 왜 다시 시작해 보는 놀음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 뭇 생명들이 꺼져 가는 그 양로원 근처 거기에서도, 저녁은 우수가 깃든 휴식 시간 같았다. 그토록 죽음이 가까운 시간에 그곳에서 엄마는 마침내 해방되어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준비가 되었다고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나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방인>p. 127


황혼은 그래서 특별한 시간입니다. 길고 커진 나의 그림자를 대며한는 시간. 한낮의 태양이 내 그림자를 흡수해 나의 혼란을 부추긴다면 황혼은 나의 그림자를, 나보다 커진 그림자와 함께 완성해가는 시간이죠. 세계와 나의 관계와 부조리한 생을 깨닫는 것은 태양이 꺼져가고 생명이 꺼져가는 황혼에서야 어쩐 일인지 타오릅니다. 그러기 위해서 인간은 절대량을 채워야 하는 모양입니다. 뫼르소의 엄마는 오래 시간 동안, 뫼르소는 짧은 시간 동안 압축적으로 절대량을 채웠던 게 아닐까요?


"세계가 그토록 나와 닮아서 마침내 그토록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닫자,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다고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외로움을 덜 느낄 수 있도록, 내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처형되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이방인>p. 127



타자의 관심이라면 질색하던 뫼르소가 세상의 구경꾼들과 맞서기로 하다니요. 분명 뫼로스를 이해하고 포용하는 세상은 훨씬 더 나은 세상이겠지요. 뫼르소적 인간이 이방인으로 남지 않는 세상이 있을까만 그런 그를 이해하면 나는 더 좋은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종일관 우수에 젖었던 소설은 마지막 페이지에 가서야 생에 대한 찬가로 뜨겁습니다. 그래서 이 소설은 다정하고 찬란합니다.


뫼르소처럼 저도 무심함, 태연함. 있는 그대로의 자신, 내일의 즐거움을, 여름날의 저녁을 사랑합니다. 태양이 고점에서 포물선을 그리며 서서히 떨어지다가 나와 나란해지면 노을을 토해놓습니다. 비로소 태양이 세상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그만두기로 한 시간, 포물선의 끝에 서서 긴 그림자와 함께 태양을 기다리고 있노라면 무엇이든 어디든 갈 수 있을 것만 같거든요. 아직 불을 켤 시간이 아니므로 남은 빛으로 무얼 할지 곰곰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 시간이 만족스러워요. 당신이 썼듯, 이 시간엔 세계의 "다정한 무관심"이 존재할 것 같습니다.


이 세계에서 부조리는 상수고 나는 변수입니다. 뫼르소가 말했던 "이 삶을 회상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저도 꿈꿉니다. 딸도 나도 남편도 상수와 대결하는 건 부질없는 일이죠. 우리끼리는 모양을 바꿔가며 그날의 그림을 만족스럽게 완성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여름 저녁 어디로 갈지 결정할 수 있어요. 지금은 봄, 계절의 변수는 벚꽃입니다. 오늘 대한민국의 변수 벚꽃과 나는 부조리한 세상을 살아가야 하므로 멜랑꼴리한 찬란함을 장범준의 벚꽃엔딩으로 소화합니다. 당신도 이 멜랑꼴리하면서 낭만적인 장범준의 음색을 마음에 들어했을 겁니다. 카뮈와 장범준 사이엔 공통점이 있어요. '이방인 연금'과 '벚꽃연금'. 저도 저작권 연금을 누리고 싶습니다. 저라는 변수는 오늘도 이 목표를 향해 쓰고 지웁니다.


편지를 마치며 당신이 수면 위로 끓어올린 세계의 상수 부조리, 당신이야말로 세계 첫 부조리감별사가 아닐까 생각하며 묻습니다. 먹는 양을 줄이고 운동을 늘렸는데도 뱃살이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것은 아무래도 부조리합니다. 맞나요?


                                                                                                     꽃에 파묻힌 계곡에서 랑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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