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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을 Oct 08. 2023

포드 기원 115년에 읽는 <멋진 신세계>


미국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헨리 포드는 40세가 되던 1903년에 자동차 회사 '포드'를 설립했다. 1908년은 헨리포드가 T형 자동차를 생산해 낸 첫해이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1932년 출간되었다. 이 소설의 신세계는 자동차왕 헨리 포드가 T형 자동차를 출시한 첫해 1908년을 기점으로 창조된 세계다.


컨베이어 벨트에서 대량생산되는 포드 T모델(좌)과 헨리 포드(우)


이 세계는 포드의, 포드에 의한, 포드를 위한 사회다. 기독교를 대신해 포드교가,  B.C와 A.C 대신 B.F(Befor Ford, 포드 기원전)와 A.F(After Ford, 포드 기원후)로 시대를 구분한다. 십자가 대신 T자가 성호이고, 그레고리력 대신 포드력을 쓴다. <멋진 신세계>의 소설속 시대는 포드력 632년이다. 그런데, 대관절 이 소설은 왜 헨리 포드를 신세계의 교주로 삼았을까.

 


헨리 포드는 최초로 컨베이어 벨트를 도입함으로서 대량생산 체제를 구축한 혁신가다.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시스템은 동일한 생산 공정을 반복하는 ‘표준화’, 각자 자신이 맡은 부분만 담당하는 ‘분업화’,  자신의 일을 완벽하게 해내는 ‘전문화’로, 이를를 포디즘이라고 부른다. 현대 사회의 제조 시스템은 모두 이 포디즘에 기반한다. 그는 또한 1일 8시간 노동에 주 5일제를 정착시켰다. 시간적 여유가 생겼고, 자동차가 싸게 보급되어 생활권이 넓여졌다. 중산층이 등장했고, 노동자의 일상은 판이하게 달라졌다. 소비가 생산을 견인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자체다. 그는 그야말로 '현대'를 창조했다.



<멋진 신세계>는 전쟁을 겪은 뒤 세계 통합 정부가 들어서고 전체주의가 전면에 나서면서 전쟁 이후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인간 세계를 포디즘에 입각해 재창조한다. <멋진 신세계>가 출간된 1932년에 헨리 포드는 70에 가까운 나이였다. 그가 사망한 건 1947년이니 그도 이 소설을 알았으리라. 그가 이 소설을 읽었을까? 세계 최고의 저성 GPT에게 물었으나 답을 얻지 못했다. <멋진 신세계>는 누구도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기업가적 마인드를 빼다 박았다. 풍자라니, 옳지 않다. 헨리 포드의 시스템은 긍정적으로  <멋진 신세계>로 이식되었다.



자동차를 생산하던 컨베이어 벨트의 대량 생산 체제는 인간을 생산하는 체제가 된다. 아이가 컨베이어 벨트에서 생산되므로, 부모도 가족도 없다. 섹스는 오직 유희로서 존재하며, 만인이 만인을 공유하는 열린 시스템이다. 오늘 오전 마르크스와 즐기고 오후에 트로츠기를 만나 환승 데이트를 즐길 수 있다.(빅뱅의 승리, 죄책감 따윈 버려) 가족이 없다는 건 욕망의 가지치기가 되었다는 뜻이므로, 행복에 이르기 쉬운 세계다. 자식 문제로 골머리 앓는 정치인들 때문에 가끔 자신의 계급을 뼈아프게 확인하는 일이 없어서 좋지 않나? 저출산에 허덕일 일도 없고.



전문화, 표준화, 분업화의 포디즘대로 철저하게 분업화되고 전문화되어 있는 직업 세계다. 나아가 철저한 계급 사회이다. 태아 때부터 섬세하게 조작된 덕분에 각 분야별로 요구되는 능력에 적합한 인간을 생산해내고 계급별로 타고난 능력치를 조절해서 생산한다. 알파, 베타가 전문가 계급이다. 델타, 감마, 앱실론이 하부 노동을 담당한다. 태아 시기 혈액 공급을 적게 받을수록 낮은 계급이 된다.  모두  5 계급이 철저히 분업, 표준, 전문화되어 있다. 누구든 쉽게 대체될 수 있는 시스템으로 사회가 안정과 효율을 추구한다. 내 자식이 가장 작고 못나고 더러운 일을 하는 앱실론이 될 일이 애초에 불가능하니 얼마나 좋은가.



5퍼센트가 아니라 95퍼센트를 위한 물건을 만들어야 한다. 소수의 부자만 소유했던 자동차가 헨리 포드 이후로 대중에게 보급화되었다. 이 신세계는 포드의 철학을 받들어 하층 계급에게도 운송 수단을 소비하게 하는 데 최선을 다한다. 샤넬도 람보르기니도 95프로를 위해 만들어지고 소비되는 세상, 생산과 소비의 표준화 환영한다. 상류층에게 가장 큰 고통은 자신들을 선망하는 하부가 사라지는 것 아닐까? 마음에 쏙 든다.




노동자에게 여가는 시간 낭비 혹은 사치라는 고정관념을 버려야 할 때입니다. 하여 1920년대 하루 8시간 주 5일 근무제가 시행되었다. 이 신세계에서도 소비가 권장되며, 노동자들의 워라벨은 지상 최고다. 낡으면 버리고 새로 사야 하는 소비 사회이다. 고층 빌딩의 자가에 살고 일이 끝나면 언제든 헬리콥터로 세계 어디든 마음껏 놀러다니는 삶. 이 사회는 오늘 저녁 도쿄에서 오마카세를 먹고 서울에서 잠드는 일이 특별하게 인스타에 올라가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모두 하고 있으니까.



미래에 대한 공포와 과거에 대한 존경을 버려라. 혈연 관계와 부모는 상스러운 것이다. 감히 입에 담기 부끄럽다. 일부 일처제도 야만적이다. 책은 소비의 둔화를 가져오므로 필요 없다. 포드 이전 세대의 유뮬은 모두 파괴되었다. 노화도 정복했으므로, 다가올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60까지 17세의 육체를 유지하다 깔끔하게 죽는다. 그러니 다가올 신세계를 두려워하지 말자.



 국제금융자본이 모든 국가위에 군림하는 누상정부(樓上政府)로 존재하는 한 평화는 불가능하다. 헨리포드는 금권을 혐오했다. 금융은 기본적으로 노동자들에 기생하는 산업이라 여겼다. 가만 보니 이 세계에서는 개인이 대출 이자로 고통받도록 사회가 내버려 두지 않는다. 은행과 내 집을 공유할 일은 없는 것이다. 헨리 포드가 주도한 컨베이어 벨트 노동은 끔찍한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언급되곤 한다. 그렇지만 컨베이어 벨트의 노동은 적어도 정직한 거 아닐까? 노동량이 증명되는 노동. 노동량을 증명할 수 없는 거대 관료 사회의 숱한 비효율적인 노동과 노동자들에 기생해서 살아가는 금융 산업에 비하면 순수해보이기까지 하다.



그리고 소마와 최면학습

<멋진 신세계>는 우연을 통제하고 안정과 효율을 추구하는 사회다. 이 사회도 우연한 일과 걱정 거리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어서 삶의 빈 공간을 메우고 본업 복귀를 돕기 위해 소마를 개발했다. 소마는 1그램이면 10가지 걱정이 사라지는 향 정신성 약물이다. 인체에 어떤 해도 주지 않는다. 마약이 흘러다니는 세상이다. 소마가 낫다. 또  내가 앱실론으로 태어날까 걱정인가? 그렇다면 최면 학습을 믿어라. 최면 학습은 자는 동안 수십번 반복하여 세뇌시킨다. 자기 계급에 만족하고 자기 일을 사랑하도록 설계된다. 내가 알파든, 베타든 델타든 감마든 모두 동일한 만족과 행복을 누리도록 준비되어 있는 사회다. 타 계급을 선망하는 일은 없다. 



어떤가. 이 정도면 헨리 포드가 이 책을 보고 만족했을 것 같지 않은가? 헨리 포드가 이루었던 것 중 이 세계가 놓친 것이 있다면 노동자 차별이다. 헨리 포드는 당시 흑인 차별이 심했던 미국 사회에서 인종간 차별을 없애고 월급과 승진 체계에서 같은 대우를 해줬다. 장애인도 고용해서 같은 월급을 줬다. 여성에겐 차별이 있었다는데 이 점이 아쉽다.  <멋진 신세계>는 왜 계급간 신분 차이를 두었는지 의문이다. 수면 교육으로 서로의 계급에 대한 호감을 없앴다고 하더라고 근본적인 차이는 있어 보인다. 도시의 삶은 하부의 육체 노동들에 절대적으로 빚지고 있는데 말이다. 계급간 존중이 불가능할 이유가 없다. 적어도 <멋진 신세계>에서는 말이다.최면 교육 잠언에 "나도 대단하지만 쟤들 없인 못살아." 정도의 멘트를 넣어주었어도 좋지 않았을까? 



1908년을 원년으로 포드력이 시작되었다. 올해는 포드 기원 115년째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앞으로 517년이 남았다. 소마는 포드 기원 178년에 착수 184년에 생산되었다. 앞으로 소마를 먹을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도 죽기 전에는 힘들겠지. 소마가 멀었다면 노화 극복이 먼저인데 소설에 따르면 노화는 가장 마지막에 정복되었다. '멋진 신세계'로 제대로 가고 있는지 좀 걱정이 되기까지....?


나만 해도 포드력으로 전환해서 이 세계를 짐작해보는 게 어렵지 않다. 첫 출간 당시엔 개인의 자유를 박탈하고 선택권이 없는 사회가 디스토피아로 여겨졌겠지만 그때와 달리 요즘 사회와 이질감이 별로 없다. 위선적인 계급 사회보다 명확한 계급사회가 더 나쁜지 알 수 없다. 전화 포비아에 시달리고 서브웨에서 재료를 선택하다가 눈물을 흘리는 일도 다반사라는 요즘 세대는 이 소설을 어떻게 느낄까? 엄마를 빼앗다니 분노할까? 엄마가 없는 세상에 환호할까? 그들에겐 유토피아일까 디스토피아일까? 글쎄, 이 질문도 이미 낡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이미 헉슬리가 내다본 세계에 가까워졌다고 느끼는 건 나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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