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쓰을 Mar 02. 2023

헤세에 두 세계를 고함

<데미안>

그녀는 완전히 아버지와 어머니의 세계, 우리의 세계, 밝고 올바른 세계에 속했다. 그러고 나서 곧바로 부엌이나 외양간에서 내게 머리 없는 난쟁이 이야기를 해줄 때나 작은 푸줏간에서 이웃 아낙네들과 싸움질을 할 때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다른 세계에 속했다.


당신과 나의 두 세계


헤세 당신과 나 사이엔 시대 말고도 계급과 이성이라는 큰 차이가 있어요. 그래서 싱클레어의 두 세계보다 그 집 하녀가 발 담근 두 세계가 저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더군요.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데미안>>을 읽는 동안 몰입을 방해한 몇 가지 요소가 있었어요. 첫 번째는 도취적이면서 건조한 문장들이 그랬습니다. 당신과 퍽 닮은 데가 있는 니체의 철학서가 더 문학적으로 다가왔다면 과장일까요? 당신도 니체를 좋아했으니 어느 정도는 받아들여줬으면 합니다.


두번째는 계급의 문제예요. 싱클레어의 어린 시절을 형성한 밝은 세계 부분입니다. 완벽한 부모, 맑은 누나들, 온화하고 따뜻한 가족의 근간은 예배도 기도도 노력도 아닌, "하인"이예요. 나에게도 매일 밥을 지어주고 관악산만큼 쌓인 빨래를 돌려 햇볕에 보송보송하게 말려줄 하인들이 있다면 싱클레어의 엄마보다 더 좋은 엄마가 될 테고, 가족은 그보다 더 유머가 가득했을 것이라 장담하겠어요.


에바 부인에 관한 첫인상을 싱클레어는 이렇게 썼더군요. "아름답고 기품 있는 이 여인은 아들과 비슷하게도 시간도 나이도 없이 영적인 의지가 충마난 얼굴로 내게 친저란 미소를 보냈다." 이내 이렇게 씁니다. "나는 달콤한 포도주처럼 그 목소리를 마셨다. 이제 눈을 들고 그녀의 고요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속을 헤아릴 수 없는 그 검은 눈을, 무르익은 싱싱한 입술을, 표가 찍힌 당당하고 탁 트인 이마를."


집안일과 육아에 지친 가련한 영혼은 쓰죠. "그녀에겐 부리는 하인이 있다." 첫인상도 마지막 인상도 그 이상을 뛰어넘진 못했어요. 혹시 니체의 영혼을 잠식했던 루 살로메를 염두에 두고 에바 부인을 묘사했을까요? 어린 릴케와 사랑을 나누었던 모습이 떠올랐어요. 에바부인을 사랑하는 싱클레어에게 당신의 꿈(에바를 향한 사랑)을 실행하라고 단호하게 말할 때는 솔직히 반하긴 했습니다. 


22살 릴케는 14살 연상의 루 살로메와 사랑에 빠진다. 니체가 사랑했던 여인이기도 하다. 에바 부인 느낌 있나요?

그럼에도 그녀가 가진 아름다운 용모와 카인들의 대모다운 단단한 지혜는 스스로 얻은 깨달음에만 있지 않아요. 당신 생각과 달리 제가 보기엔 그녀는 삼무삼유의 혜택을 누렸던 겁니다, 삼무, 그녀에겐 3가지가 안 보여요. 시댁, 남편, 집안일. 그녀는 세 가지를 소유했어요. 하인, 돈, 멀쩡한 자식. 자식을 키워보니 자식은 원하는 대로 되는 게 아니고 타고난 대로 되더군요. 이 내용은 서머싯 몸이 <<달과 6펜스>>에서도 거론한 적이 있어요. 굳이 서머싯 몸까지 갈 필요도 없어요. 당신의 부모님들도 그건 잘 알았을 겁니다.


모두까기는 그만두고, 당신처럼 극명하게 대립되는 두 세계에 관한 체험을 들려드릴까 합니다. 



나만의 두 세계


현재 대한민국은 결혼과 동시에 남편의 가족을 얻게 되요. ’시댁‘이라고 부릅니다. 여자의 원래 가족은 ’친정‘이 되죠. 이 두 세계는 당신이 말한 밝음과 어둠만큼이나 극명하게 대립되는 세계입니다. 시댁을 어둠이라고 친정을 밝음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어요. 전 이렇게 구분하죠. ”나를 설명하고 싶은 욕망을 느끼는 곳“과 ”나를 설명할 필요가 없는 곳“ 전자는 시댁이고 후자는 친정입니다.


”결혼 전 집밥을 좋아하지? 내 아들은 집밥 좋아한다.“라고 했을 때, 언니와 함께 살고 있던 저는 집밥을 먹어 본 적이 별로 없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시댁에 갈 때마다 대패 삼겹살을 구워 먹으라며 내어 주셨지만 ”전 대패 삼겹살을 좋아하지 않아요. 도톰한 게 좋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남편이 출세해야 하니 집안일을 시키지 말라는 말에 ”저는 남편의 출세에 관심이 없어요“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한 마디로 ”전 그런 여자가 아니예요.(데미안의 친구라고요!)“라고 늘 항변하고 싶었습니다. 설명한들 ”표가 찍힌 당당하고 탁 트인 이마를“ 시댁에서는 알아볼 리가 없습니다만.


새는 투쟁하죠.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 친정에서라면 전 알을 깨고 나오려는 새였습니다. 바깥 세상에서 훨훨 날고 싶었어요. 고집스럽게 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어요. 아니 그렇게 멀리 날아서 온 곳이 관악산 기슭의 어느 가정이고, 나를 멋대로 꿰맞추려는 시댁이라니, 헤세 당신 눈에도 어처구니가 없겠지요. 하지만 당신이 지지하는 자들은 여기에 굴하지 않습니다. 매번 나를 설명하고 싶고, 나는 그렇지 않다고 항병하는 대신, 스트레스를 줄이는 방식으로 조금은 불만족스러운 며느리가 되어서 무심하게 굴고, 즐거움과 나다움을 좇습니다. 그러다 조금이나마 돈을 벌러 나갑니다. 신기하게도 일을 다시 시작하니 대부분의 갈등이 수면 밑으로 가라앉는 느낌입니다.


바라는 것은 돈이었다거나 직업이 자신을 구원한다라고 말은 옳지 않습니다. 여성의 가사와 육아 노동에 대한 가치는 늘 기대치를 밑돈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을 맞이한 것뿐이죠. 그런데 이것이 기혼 여성에게는 큰 좌절감과 실망감을 안겨줍니다. 직업을 가지고 돈을 버는 순간부터 그 고생이 객관화되어 모두에게 조금이라도 지지를 받습니다. 특히 시댁에서는 더 그렇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어요. 당신이 결코 알 수 없는 대한민국에서 투쟁하는 한 주부의 초상입니다.


저도 그래서 데미안을 부릅니다. 저의 데미안들도 곳곳에 있어요. 당신의 책을 비롯해 다른 고전들이 그렇고, 시댁과 불화하든 그렇지 않든 지혜롭게 자기 삶을 꾸려가는 여성 동지들이 있고요. 아웅다웅하지만 저의 친정 언니들이 있습니다. 패거리로 살아가길 조장하는 세상이지만 휩쓸리지 않고 자기다움을 유지하며 각박하고 혼란한 대한민국을 헤쳐가는 나의 언니들이, 동생들이 있지요. 그들과도 당신의 책을 함께 읽고 서로에게 데미안이 되어주는 일을 해보고 있습니다. 기특하지 않나요?^^


쓰고 보니 당신을 이해시켰나 자신이 없네요. 대한민국의 기혼 여성이라면 이해해주리라 믿으며, 멈출까 합니다. <<데미안>>을 읽을 때보다는 읽고 난 후 독후를 기록하는 일이 훨씬 즐겁네요. 이것도 당신의 빅픽쳐일까요? 


                                                                                                          관악산 기슭에서, 랑 드림.




매거진의 이전글 포드 기원 115년에 읽는 <멋진 신세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