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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을 Jul 04. 2024

져도 좋다.

둘째는 화를 내는 법이 거의 없다. 아주 가끔 동생이 저세상 싸가지를 보여줄 때도 화를 내기보다는 분해서 운다. 어쩌다 아주 가끔 화를 내면 위협적이지 않고, 어색하기 짝이 없다.


오늘은 첫째 의자가 새로 들어왔다. 쓰던 의자를 거실에 내놓자 둘째가 쓰고 싶다고 말한다. 첫째는 싫단다. 거실에선 전에 쓰던 자기 의자를 쓰겠다는 거다. 둘째는 섭섭한 모양이다. 나는 의견 조율을 시도하고 첫째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10분도 못 되어서 둘째가 첫째에게 "누나, 의자는 그냥 누나가 써"라고 양보하고 만다. 칭찬할 일은 못된다. 의사를 표현했으면 상대에게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시간을 갖는 게 아이가 배워야 할 일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미리 갈등의 요소를 제거하는 아이에게 답답함을 느낀다.


나 : 미리 져주려고 하지마. 저번에 후배가 너에게 틱틱거리는데도 실실대고만 있고. 단호할 땐 단호해야지.(그런데 생각해보면 후배의 예의 없는 행동을 그냥 너그럽게 봐주었으면 하고 말을 건넸던 적도 있으니, 내가 문제인가 싶다.)

둘째 : 전 원래 지는 스타일이예요.

나 : 누가 널 함부로 하게 둬서는 안 돼.

둘째 : 져도 괜찮아요. 피구에선 절대 안 져요.


아이는 지기 싫은 게 있고 그건 지켜낸다. 공정한 승부의 세계에서라면 봐주지 않으려는 마음, 멋있다. 둘째가 늘 멋진 건 아니지만, 가끔 과하고 도덕 관념이 희박해서 나에게 걱정을 한아름 안기지만, 어떤 면에서는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자존감과 멋짐과 여유가 있다. 한 수 배운다. 나에게 의미있는 중요한 일엔 이기지만 나머진 져도 좋다.  웬만해선 스크래치가 잘 나지 않은 심플함에 원근이 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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