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는 무엇이든 느리다. 늘 멍 때리느라 바쁜 아이. 나는 주기적으로 아이의 집중 상태를 확인해야 한다. 밥을 먹을 때도 과제를 할 때 도 옷을 입을 때도. 아침에 옷을 입는 데도 최소 10분이 걸리는데 과정은 이렇다.
1. 옷입어야지? 네~. 의자에 앉는다.
2. 옷 입어야지? 네~ 그대로 앉아 있다.
3. 뭐하니? 윗도리를 벗고 있다.
4. 뭐해? 상의 탈의하고 앉아 있다.
5. 다 입었니? 하의까지 탈의하고 팬티만 입고 앉아 있다.
6. 가야지? 이제 윗도리를 입는다.
7. 뭐하니? 아랫도리를 입는다.
저녁이 되면 이 과정이 재생된다. 아침 저녁 2회 팬티 차림 가부좌 자세를 고정적으로 보여주신다.
<걸리버 여행기>는 걸리버가 릴리펏(소인국), 브롭딩낵(거인국), 라퓨타(천공의 성), 휴이늠(말의 나라)를 여행하는 기록이다. 제3부 라퓨타에는 치기꾼이 등장한다. 늘 사색에 잠긴 주인(왕족, 귀족)들이 타인의 말을 듣고 말을 하게 하기 위해서 사색에서 깨어나도록 주인을 깨우는 역할이다. 치기꾼들은 막대기에 달린 주머니를 가지고 다니면서 주인들을 깨우는데 주인들은 치기꾼이 없이는 앞에 있는 부인이 딴남자와 애정행각을 벌여도 모른다.
축구할 때 외에는 현실에서 둥둥 떠다니는 아들, 그 아들을 일상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늘 주머니를 두드려 아이를 먼 곳으로부터 불러들여야 하는 내가 아들의 치기꾼이지 뭔가. 나뿐이랴. 세상의 모든 부모가 치기꾼이다. 모시는 주인이 다를 뿐.
날이 풀리고 학교에서 피구연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막내도 형처럼 피구인으로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아침 8시까지 학교에 가야만 한다. 아침을 게으르게 먹으려는 동생에게 형은 자신의 커리어를 살려 전직 외야로서 치기꾼 행세를 한다. "두 번 지각하면 피구 대회 못 나간다." 오늘은 슬쩍 빠지고 싶은 마음이 있는 막내가 서두른다.
"오늘은 옷을 빨리 입어야겠어요. 생각을 하지 말고 입어야죠."
세상에, 정말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 사색에 빠져 옷을 10분 넘도록 입었던 거야? 사색하느라 1시간씩 밥을 먹었던 거고. 나는 그저 멍을 때리고 산만한 아이라 그런 모양이다 생각했는데, 사색중이었다니. 전문 사색꾼이 전문 치기꾼을 만드는 거였어. 내 아들은 라퓨타의 왕족이었던 게 틀림없지 않나. 아무래도 아이의 태생을 고귀하게 여기도록 애쓰는 편이 정신 건강에 좋을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