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알베르 카뮈(민음사)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 주고 희망을 비워버리기라도 했다는 듯,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이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이방인>알베르 카뮈(민음사)
나는 작은 섬에서 자랐다. 일그러지고 하찮은 일일 영웅부터 1년 영웅까지, 굶어서 배만 튀어나오고, 씻지 않아 빗자루 같은 머리를 얹고 코를 주구장창 달고 다니며 빨아먹는 아이들까지 다함께 붙어다 니며 머릿니를 공유하던 동네였다. 나는 그 가운데서 깔끔하고 우아하게 머릿니를 숨기고 다니는 작은 아이였다. 욕은 쓰지 않았고, 책을 좋아했으며, 자기 표현을 잘 하지 않은 수줍은 아이여서 얼굴이 잘 빨개졌지만 무대체질이라 학예회 때는 작정하고 장기를 만들어내곤 했다. 말싸움조차 잘 하지 않았던 내가 생애 최초이자 마지막 몸싸움을 벌였던 건 국민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뜨거운 계절, 청포도가 담을 넘어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 골목이었다. 5분 정도의 말싸움이 이어지던 찰나 "뭐라고? 니가 먼저 그랬잖아!"라고 앙칼지게 외치고 친구의 머리끄덩이를 붙잡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서로의 단발머리를 움켜쥐고 몸을 수그리고 소싸움하듯 붙어서 대치했다. 무슨 이유로 싸웠는지는 알 수 없다. 기억할만하지 않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으리라. 좁은 길에서 먼저 비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싸웠다고 해도 하나 이상할 게 없는 시작은 흔했으나 대결은 창대했던 싸움이었다.
나는 필사적이었다. 상대는 사교성이 좋아 말빨도 좋았고, 성적도 좋았고, 몸으로는 무엇이든 잘했다. 그래서 종종 억울하다고 느끼는 일들이 많았다. 그 날만은 어쩐 일인지 억울함이 폭발해서 지고 싶지 않았다. 한참을 대치하고 있었는데 그 아이가 먼저 울었다. 그제서야 나는 손에서 힘을 뺐다.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돌아와 그날의 무용담을 식구들에게 떠벌렸다. 좀 밀리는 듯한 느낌적인 느낌은 비밀이었다. 그 아이는 왜 울어버렸던 걸까?
그 날 이후 달라졌다. 나도 싸울 수 있다는 것, 내가 이겼다는 것, 당하고만 있지는 않는 나 자신에 대한 자신감과 확신으로 꽤 즐거웠다. 평소의 나는 미운 가족이나 친구들이 있으면 혼자 방안에 앉아서 울었다. 울다가 내가 죽는 것을 상상했다. 가족이나 친구들이 장례식에서 내 관뚜껑 위에 눈물을 뚝뚝 흘리며 지난날 나에게 못되게 굴었던 걸 참회한다. 현실의 내가 운다. 그러고 나면 미움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이런 습관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다. 다만 내가 생각만 하고 있으면 나와 세계는 모호한 관계라서 내 편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아 착각하고 상처받지만 내가 표출하면 입장이 분명해진다. 이를 테면 내가 또 이런 일을 당하면 회피하거나 집에 와서 상상의 복수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법을 선택할 수 있고, 어디까지 붙어볼 수 있을지 결정할 수 있다. 그건 대단한 한 걸음이다.
사형을 앞두고 부속사제의 면담을 계속해서 거부하는 뫼르소. 부속사제는 불시에 뫼르소에게 방문 아니 처들어온다. 회개하고 하느님의 용서를 받으라는 회유한다. 뫼르소는 원치 않고 관심도 없다. 감옥의 벽들 속에서 하느님의 얼굴이 솟아나는 걸 보라고 요구하고 당신 편이라며 기도하려고 한다. "그때,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내 속에서 뭔가가 폭발해 버렸다. 나는 목이 터져라 고함을 치기 시작했고 그에게 욕설을 퍼부었고 기도하지 말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사제복 깃을 움켜잡았다."
간수들이 상황을 종료시켰다. 사제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괴어 있었다" 그는 왜 울었을까? 중요하지 않다. 당신들이 졌다. 내 친구가 나를 만만하게 봤던 것처럼 신부도 재판의 당사자들도 뫼르소를 만만하게만 봤다. 그를 제외하고 재판을 진행했고, 살인로 기소된 그에게 어머니 장례식 때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했다. 자신들이 원하는 답을 주지 않않았으므로로, 다행히(?) 그의 답은 미숙하고 위축된 대답들이었으므로, 일방적인 유죄를 선고한다. 모두 그를 진지한 상대로 쳐주지 않았다. 그래서 뫼르소의 반항은 뜻밖이고 강력한 펀치였다. 그는 가장 약해진 시간에 그 어느때보다 강하고 평온하다. 무엇에도 기대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이 세계의 부조리함에 맞서 자기 삶이 옳다고, 행복하다고 선언할 수 있기에.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싯어 주고 희망을 비워버리기라도 했다는 듯,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이 밤을 앞데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중학교 2학년 딸아이 담임 선생님 상담을 하던 도중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동생들을 싫어한다고 썼네요.""아주 좋습니다. 저는 아이가 자기의 부정적인 감정을 모두 사실대로 표출하고 인정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 아이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부정적인 감정을 참고 감추려고 하면 할 수록 왜곡되니까요."
그 감정은 사실 사이 좋게 지내야 한다는 강박에서 오는 것일 테다. 아이가 자기 안에서만 강박과 욕망의 갈래에서 길항하는 데 반대한다. 지속된다면 피해의식이 커지거나 상대를 오해하거나 회피하게 될 것이다. 드러내놓고 진짜 상대와 대치하길 원한다. 이런 과정이 왜 필요할까? 그건 자기 객관화 때문이다. 세계가 있고 내가 그 안에 분명하게 서려면 때로 협조하고 때로 대립하는데, 그걸 혼자서만 해서는 안 된다. 분명 상대와 분명하게 주고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기 객관화에 이르는 과정이고, 자기 가능성과 한계를 이해하는 과정이 된다.
뫼르소가 입에 달고 사는 "무슨 상관인가" "그건 중요하지 않다" 등의 말은 옳다. 타인이 측정하는 중요도는 나에게 쓸모가 없으니까. 하지만 세계와 나, 타인과 나는 상관이 있고 때때로 중요하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생생한 삶과 분명한 태도일 테고 말이다. 아이가 한 방 먹이는 일이 있다. 점점 더 맷집이 좋아지고 있다고 느낀다. 동시에 아이의 맷집도 좋아지길 기대해본다. 사춘기야, 한 판 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