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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을 May 08. 2023

빨간 선물

<빨간 머리 앤>루시 모드 몽고메리(더 모던)


"마릴라 아주머니는 얼굴이 불타오르듯이 새빨개지셨지만 그 자리에선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어."


빨강은 인류가 최초로 이름붙인 색이라고 한다. 낮의 색과 밤의 색을 제외하고 최초로 인식된 빨강. 사냥에서 흐르는 피, 들판의 빨강은 생명에 필수였고,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출산과 죽음은 피로 물들었으리라. 생명과 직결되는 빨강을 지나면 사회적으로 여러 의미를 내포한 빨강이 등장한다. 20년 동안 색채를 연구했던 괴테는 빨강은 색의 왕이라고 했다. 괴테에게 각각의 색은 무채색과 관련이 있었다. 파랑은 희미해진 검정이고 노랑은 안개낀 흰색인 것처럼. 하지만 빨강은 무채색의 요소와는 별개다. 빨강은 두말할 여지 없이 빨강이며 자립적인 왕국인 것이다. 그것은 또한 열정과 생명이다.


초록은 색 스펙트럼에서 보면 딱 중간 파장을 가진 안정된 색이다. 프린스 에드워드 섬의 에이번리에는 지천에 널린 초록처럼 흔한 남매가 산다. 아니 흔한 듯 흔하지 않은 남매가 산다. 초록 지붕 집의 마릴라와 매슈는 초록처럼 안정되고 질서 있게 움직이는 남매라는 점에서 흔하지만 좀체 빨강으로 달아오를 일이 없는 남매라는 점에서 흔하지 않다. 마을 외딴 곳에서 조용히 자기 역할을 하는 그들은 빛의 파장이 짧지도 길지도 않은 초록과 똑 닮았다. 이 보수적인 초록 속으로, 자기만의 왕국으로 빛나는 빨강이, 가장 긴 파장을 가진 요란한 빨강이 뛰어든다.


유영국의 <작품>

: 빨강이 들어오는 순간을 표현하자면 이런 느낌일까.


첫만남. 자신이 원하는 아이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자 폭풍 오열을 시전한다. 초록 지붕 집에 온지 2주만에 린드부인을 만나게 된 앤은 깡마르고 못생겼으며 머리는 홍당무처럼 빨갛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얼굴은 분노로 빨갛게 달아오르고 입술은 파르르 떨"려 "아주머니는 예의 없고 무례하고 인정도 없는 사람"이라며 되받아침으로써 시뻘건 만남을 선사한다. 마릴라는 이 일로 단단히 빡쳐서 앤에게도 매튜에게도 화를 낸다. 빨강의 도미노다. 린드 부인에게 사과를 하고 앤과 집으로 돌아오는 마릴라. "앤이 불쑥 마릴라의 굳은살 박인 손바닥에 제 손을 쏙 밀어 넣었던 순간,마릴라의 가슴에서 뭔가 따뜻하고 기분 좋은 기운이 샘솟았"다. "그 낯선 포근함"이 마릴라와 나 사이에 주홍으로 번진다. 도미노를 모두 쓰러뜨리고 보니 그 위엔 다른 색이 펼쳐진다.


앤이 다이애나의 엄마로부터 거절당하고 울다 잠들었을 때 아이의 머리카락을 쓸며 볼에 뽀뽀하는 순간은 노랑을 살포시 얹은 주황이다. 브로치 사건으로 앤이 오해를 받아 방에 갇혀있을 때 "마릴라는 모두에게 버림받은 기분"을 느낀다. 짙은 보라다. 앤이 다이애나가 결혼하는 상상으로 눈물을 쏟자 마릴라는 참지 못하고 홀로 앉아 폭소를 터트린다. 불꽃놀이 색. 앤의 실수로 푸딩 소스에 쥐가 들어갔던 걸 모른 채 푸딩 소스를 내놓았다가 마릴라는 "얼굴이 불타오르듯이 새빨개"진다. 마릴라가 철 들고 처음이 아니었을까. 앤이 다쳐서 다이애나 아버지 품에 안겨 오는 것을 보고 내달리는 마릴라의 런웨이는 단연코 뜨거운 빨강이다.


수줍음이 많고 사람을 어려워해 만남을 꺼리는 매슈는 어떤가. 앤의 퍼프 소매를 위해 읍내에 가서 낯선 가게로 들어가는이단 행위를 저지른다. 오오 빨강. 여성 점원의 장벽을 넘지 못하고 쩔쩔 매다가 필요 없는 갈퀴나 설탕을 산 이 오싹한 경험은 서늘한 파랑이다. 앤의 양육을 맡지 않고 마음껏 앤의 버릇을 망쳐놓는 매슈는 스트레스 없이 맑고 깨끗한 노랑이다. 평생 여자 얼굴도 제대로 못 쳐다보던 매슈는 앤에게는 미소 짓는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에이버리 장학생이 된 앤의 손을 토닥이는 매슈는 따뜻한 저녁 노을이 아닐까. 훗날 마릴라는 말한다. 읍내에선 매슈에게 팔지 못할 게 없다고. 황금 빛깔 매슈.


흔들림 없이 평온을 유지하는 데 평생을 힘써온 마릴라가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이 사랑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모르는 건 당연하다. 때로 이 사랑이 너무 커서 죄 많은 인간에게 집착하는 자신을 책망하고 죄책감에 시달리면서도 이 사랑을 멈출 수 없어 울고 웃는다. 아무리 붙잡으려 해도 인간적인 온기와 사랑은 결국 단조로운 색들을 물들이게 마련이다. 앤으로 인해 초록지붕은 전과 같은 색에 머물 수가 없다. 이 빨강은, 어른이 되면 파장이 짧은 쪽으로 취향이 돌아서는 자연스러운 과정을 붙잡아 세워 삶의 다채로운 스펙트럼 안으로 밀어넣는다.


앤은 기쁠 때는 "얼굴이 마치 불꽃처럼 환하게 빛나고" 흥분하면 "눈에서도 반짝였고, 온몸에서 불처럼 뿜어져 나"온다. 슬플 땐 바로 나락으로 떨어졌고, 화가 나면 석판을 깨서라도 뜨겁게 분노를 표출했다. 고집을 피우면 꺽을 수 없었다. 앤과 같이 불처럼 뜨겁고 이슬처럼 맑은 사람에게는 삶의 즐거움과 괴로움이 늘 강렬하게 찾아왔다. 마릴라는 앤을 차분하고 평온한 성품의 아이로 키우는 게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 반듯한 모범생으로 만들겠다던 생각을 포기했다. 무엇보다 마릴라 자신조차 그렇게 바뀐 앤을 지금보다 좋아할 것 같이 않았기 때문이다. 앤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사랑하자 자신이 바라던 아이와 가까워졌다. 앤의 사랑으로 단단하고 까탈스러운 마릴라에겐 곡선이 생겼다.


유영국 <작품>

: 앤과 마릴라 그리고 매슈가 함께 있다면 이제 이런 느낌일 것 같다.



시를 좋아해서 아무 때고 근사하고 거창한 시를 인용하길 좋아하는 앤. 글로 치자면 요리 책이나 바느질 잘하는 법 등이 실린 실용서의 설명문이나 잠언집의 한 페이지일 마릴라. 소중한 순간을 말로 다 뱉기 보다는 소중하게 간직하는 편도 좋다는 것을 깨닫는 앤처럼 마릴라도 때때로 감정을 쏟아내는 편이 낫다는 걸 알아간다. 마릴라의 설명문도 감정이 섞인 에세이가 되고, 앤도 현실에서 점프하는 상상의 세계나 낭만적인 시의 세계에서 벗어나 삶의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는 산문의 세계로 들어온다.


"내 안에는 앤이 여러명 있나봐. 가끔은 그래서 내가 이렇게 사고뭉치가 됐나 하는 생각이 들어. 만약 내 안에 내가 한 명이라면 지금보다 훨씬 더 편했을 거야. 재미는 절반도 안 되겠지만"


육아는 이 뜨겁고 차갑고 다채로운 일상으로 인해 수많은 자아를 만나고 헤어지고 통합하는 과정이다. 마트료시카 안의 인형들처럼 아이가 성장하는 내내 다른 자아를 꺼내야 하고 성장해야 한다. 불편하고 고단하지만 재미는 배가 된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선택하라면 나는 기꺼이 생명을 만나고 형형색색의 나와 만나고 헤어지는 일을 해내리라.


빨강을 이야기하다보니 내가 좋아하는 또다른 빨강 머리가 생각났다. 삐삐. 삐삐가 초록의 세계로 오게 되면 그땐 정말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세상 모든 활기를 끌어모았으나 사랑과 풍요는 가지지 못했던 앤과 달리, 이 땋은 빨강머리를 위로 솟게 하면 자유와 자존감이 하늘을 찌르는 부자 삐삐롱 스타킹이 된다. 앤의 빨강 맛이 한 숟가락이라면 삐삐의 빨강 맛은 한 국자다.


삐삐 앞에서라면 11살 앤도 마릴라의 위상에 이르게 될 테지. 나는! 1초도 고민하지 않고 매튜가 되어 이 아이의 양육을 맡지 않은 걸 일생 일대의 행운으로 알고 고맙게 늙어갈 것이다. 금화를 같이 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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