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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을 Mar 02. 2023

부르면 응답하는 우리들의 세계

<데미안>

”나는 가야만 해. 너는 어쩌면 다시 내가 필요할지도 몰라. 크로머나 다른 어떤 것에 맞서기 위해서 말이지. 그럴 때 네가 가를 부르면 나는 이제 그냥 말이나 기차를 타고 오진 않을 거야. 너는 네 안에 귀를 기울여야 해. 그럼 내가 네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거야. 알겠니?“


고전은 대부분의 사람이 알고 있지만 정작 실제 읽어본 일이 드문 책이라고 한다. 그중 <<데미안>>이야말로 수없이 회자되지만 정작 읽은 사람은 많지 않은 고전 중의 하나가 아닐까. 그래서 많은 이들이 책을 읽 때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주인공 이름이 데미안이 아니었어?" "아 참 주인공 이름은 싱클레어였지". 그런데 어쩌나. 책을 읽은 후에도 "어주데" 그러니까 "어차피 주인공은 데미안"이라는 느낌이 강렬하게 남는다. 미안하다, 싱클레어. 데미안은 왜 이토록 강렬할까.


<<데미안>>을 세번째 읽었다. 헤세의 소설은 망각 바이러스가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새롭다. 18살 때는 어려워서 글자만 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8에는 정말 재미있게, 기존의 프레임대로 살을 덧붙이면서 읽었다. “새는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라삭스다.” 이 문구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독서였다. 답답한 일상과 위선적이고 비합리적인 세계에서 벗어나고 싶고, 반항하고 싶은 나를 싱클레어에 대입해서 외로움과 해방감을 맛보았다. 친구에게 자랑을 했다. 드디어 헤세를 이해한 냥 "헤세 정말 멋져. <<데미안>> 정말 재미있어." 친구는 일갈했다 "헤세는 지루해. 성경책 같아" 이런, 헤세를 까다니 좀 멋있다.


40대의 <<데미안>> 읽기가 끝났다. 기독교적 신에게 죽음을 선고하고 자신 안의 신성으로 나아가길 원했던, 디오니소스적 삶의 포용과 긍정을 노래했던 니체가 보였다. 헤세는 밝음만을 인정하는 도덕적인 신을 거부하고,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 자기 본연의 모습에 이르는 과업을 지닌 카인의 후예들, 이 후예들의 자기 완성을 돕는 신, 아프라삭스에 니체의 사상을 담은 듯하다. <<데미안>>은 문학의 외피를 두른 철학서가 아닌가 싶었다. 좀 지루했단 이야기다. 와중에도 데미안과 아프라삭스는 더욱 생생하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신은 어둠을 밀어내는 데 능숙한 신이다. 나약한 우리가 반쪽자리 신에게 매달리고 싶은 이유다. 나의 어둠, 세계의 어둠을 이해하지 않고, 모른 채 살아가는 나를 온전하다고 볼 수 있을까. 내 안도 세계도 이토록 복잡하고 선악이 뒤섞여 나뒹구는데 신의 세게는 어떻게 그렇게 늘 선악과 선호가 분명할 수 있단 말인가. 이분법적 세계관에 따라 자신을 분열시키기보다는 어둠과 밝음을 통합해 본연의 자아로 나아가야 한다. 이러한 세계를 상징하는 신이 아프라삭스다.


"우리 신의 이름은 아프라삭스야. 그 신은 신이며 동시에 악마지. 자기 안에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를 동시에 지니고 있어. 아프라삭사는 자네의 생각 그 어느 것도, 자네의 생각 어느 것도 반대하지 않아. 이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게. 하지만 자네가 언젠가 흠 없이 정상적인 사람이 되면 이 신은 자네를 떠날 거야. "


 

놀라운 것은 이 신은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시하고 가르치지도 않을 뿐더라 판단하지 않을 것이다. 정상적인 사람이 되면, 어쩌면 온전한 자아의 본질에 이르게 되면 신은 심지어 떠난다. 섬기기를 원하지 않는 신이다. 좋다. 이런 신이라면 함께 깨달음을 얻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싱클레어처럼 카인의 표식을 지닌 채 세계를 깨고 나오고자 투쟁해야 한다면 고독과 외로움은 필연이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끝도 없이 외롭고 고독해야 하는가. 고독한 투쟁가들에게도 온기와 지지가 필요하지 않을까. 싱클레어에게는 데미안이 찾아왔던 순간들이 그랬다. 데미안의 응답은 구원이었다.


싱클레어가 프란츠 크로머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 카인의 표식을 알아본 데미안이 나타남으로써 해방된다. 김나지움에서 술로 인생을 탕진하던 싱클레어가가 알을 깨고 나오는 새 그림을 데미안의 옛 집으로 보낸다. 답을 기대할 수 없는 발송이었다. 그럼에도 데미안은 “아프라삭스”에 관한 메시지로 응답한다. 싱클레어가 철학을 공부하러 떠난 도시에서 데미안과 그의 어머니 에바부인을 만난다. 데미안은 줄곧 싱클레어를 부르며 기다리고 있었다. 싱클레어는 에바 부인을 사랑하게 되고, 어느날 그녀의 가르침대로 온 에너지를 집중해 에바부인을 부른다.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나타난다. 어머니가 싱클레어의 부름을 들었노라고, 대신하여 왔노라고. 전쟁터에서 부상을 당한 싱클레어는 강렬한 부름 속에서 어딘가로 이동한다. 눈을 떠보니 옆에는 데미안이 있다. 죽어가는 데미안이 말한다.


”나는 가야만 해. 너는 어쩌면 다시 내가 필요할지도 몰라. 크로머나 다른 어떤 것에 맞서기 위해서 말이지. 그럴 때 네가 가를 부르면 나는 이제 그냥 말이나 기차를 타고 오진 않을 거야. 너는 네 안에 귀를 기울여야 해. 그럼 내가 네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거야. 알겠니?“


데미안은 깨달음을 향해 가는 고독하고 힘겨운 이들의 부름에 응답했다. ”친구이며 길안내자“로서 지금이라도 당신이 부르면 데미안은 응답할 것이다. 싱클레어가 데미안이 되었고, 싱클레어의 데미안이 또다른 데미안을 낳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헤세가 고통받는 고독한 개인들의 투쟁에 답하는 방식이고, 투쟁을 지지하는 방식이다. 세상에 더 많은 데미안을 보내주겠다고 응원하는 것이다. 또한 묻는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신이 점령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당신과 내가 부르고 응답함으로써 채워갈 수 있는 거 아니냐고. 헤세는 데미안을 떠나보내며 또렷이 보여 주었다. 힘겹게 투쟁하고 있는 카인의 후예들에게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믿음을. 한 번쯤은 내가 부르면 당신이 응답하는 우리들의 세계를 또렷이 경험해보고 싶다.


지난해 여름 타국 멀리 있는 임언니에게 말했다. ”언니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믿어?“ ”당연한 거 아니야. 보이지 않는 세계를 안 믿는 게 더 이상한 거야. 오랫동안 멀리 떨어져 있는 너와 내가 이렇게 어제처럼 대화를 하는 게 다 그래서 가능한 거잖아“ 알쏭달쏭했던 당시 언니의 말을 이제는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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