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을 읽고
아버지가 죽었다. 그로부터 한 달만에 어머니와 숙부가 결혼했다. 상심한 햄릿에게 아버지의 혼령이 나타나 어머니와 숙부가 간통을 했으며, 숙부가 아버지를 독살했음을 알려준다. 귀신이 달리 귀신인가, 이승의 비밀들을 알려줄 수 있어 귀신인 거지. 그러므로 귀신의 말은 일단 일리가 있는 것으로 한다.
독일에서 유학중이던 햄릿의 귀환, 그는 돌아가신 선왕으로부터 '복수'라는 숙제를 받아든다. 아버의 죽음, 어머니의 간통, 이어지는 재혼만으로도 버거울 햄릿이자만 햄릿에게 더 고통스러운 건 아버지가 내준 "복수"라는 숙제다. 이전의 일들은 자신의 의지나 선택과 상관없는 일이었고, 감정 소관이라 상심 중에 머물거나 떠나면 그만이다. 대체로 시간이 해결해줄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숙제는 햄릿에게 온전히 맡겨진 것이다. 마냥 미룰 수도 없다. 햄릿은 혼령이 내준 숙제 앞에서 고민한다. "To be or not to be"
햄릿이 우유부단한 성격이라는 오해는 여기서 시작된다. 당시 복수는 선택이 아니다. 아버지의 과업은 아들에게 아버지의 죽음은 아들의 복수로 끝맺음된다. 성찰없이 즉각 실행헤 옮겨야 할 과제다. <햄릿>에는 세 명이 아들이 나온다. 그들은 모두 아버지를 잃었다. 노르웨이의 왕자 포틴브레스, 덴마크의 가신 폴로니어스의 아들 레이터즈, 그리고 덴마크 왕의 아들 햄릿. 셋 다 아버지의 복수라는 숙제를 받았다.
노르웨이의 왕자 포틴브레스의 아버지는 햄릿의 아버지와 땅을 두고 싸우다가 죽었다. 포틴브레스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군대를 모아 덴마크로 처들어오는 도중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삼촌으로부터 복수를 제지당한다. 레어티즈는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덴마크로 돌아와 아버지를 죽인 자에게 복수하려 한다. 처음엔 햄릿의 숙부에게 덤비고, 진범이 햄릿인 걸 알게 되자 햄릿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포틴브레스에게도 레어티즈에게도 "To be or not to be"는 없다. 왜 햄릿만이 고민하는가?
극이 진행되는 동안 햄릿만이 줄곧 이질적이다. 숙부도, 어머니도 자연스럽다. 햄릿의 상심이 별스럽다고 생각한다. 신하들도 새왕과 왕비에게 바로 적응했다. 어릴적부터 함께 자라온 죽마고우인 길던스턴과 로즌크래츠도 햄릿의 광증에, 광증의 이유에도 관심이 없다. 왕의 명령을 받고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뿐, 친구의 상황에 공감하는 기색은 없다. 사랑하는 오필리어마저도 햄릿의 상황엔 관심이 없다. 모두가 이 상황을 자연스럽게 여기고 자기 역할에 금방 적응했지만 햄릿만이 자기 역할에 적응하지 못한다.
1500년대 초반 영국의 헨리8세는 형의 왕비 캐서린과 결혼했다. 그런데다 6번의 이혼과 결혼을 반복했다. 그중 두번째 부인의 딸이 우리가 잘 아는 엘리자베스 여왕이다. 셰익스피어가 활동했던 1500년대 후반엔 정략적인 이유로 왕이 형수와 결혼하는 일이 드문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햄릿은 왜 이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일까?
1500년대 영국은 청교도혁명이 일어났던 시기다. 1000년의 중세가 마무리되고 근대가 태동하던 시기다. 14세기에서 16세기까지는 르네상스의 시대이기도 하다. 인간 중심적인 사고가 대두되고 종교, 공동체 가문의 가치관과 관습이 서서히 물러서는 시대라고 볼 수도 있다. <햄릿>은 이 시대에 탄생한 작품으로, 극중 햄릿은 새로운 세대의 한 모습으로 일찍 태어났다.
극의 상황을 개인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어머니의 간통과 재혼은 실망과 고통을 안겨주는 문제가 된다. 그는 정략적으로 행동하는 왕자라기 보다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를 잃은 한 청년이다. 그렇기에 공동체의 관습대로 살아가는 주변인들과는 이질적인 존재다. 1500년대 햄릿은 1988(응팔) 대한민국의 선우와 택이와 나란히 앉아 부모의 재혼으로 인한 상심을 나누어야 마땅하다. 당시엔 햄릿의 이런 심정을 이해할 귀족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개인으로 존재하고 사유함으로써 낡은 전통과 가치관을 피하고자 했기에, 선택하려 했기에 비극을 맞는다. <로미오와 줄리엣>도 가문의 관습과 전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젊은이들의 욕망과 선택을 그렸다고 보면 확실히 셰익스피어는 변화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에게 관심과 애정이 있었던 걸로 보인다. 성찰하는 젊은이와 자기 선택과 욕망에 솔직한 개인 앞에서 변화해야 하는 것은 낡은 관습과 전통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근대라는 공간은 오랜 중세를 장악했던 절대적인 신의 세계에서 벗어나 개인 스스로 자신의 윤리를 설정해 나가야 하는 공간이다. 우리가 자유를 누리는 대신 얻은 형벌이랄까. 햄릿에게 복수는 "젊은이의 관찰이 적어놓은 그 모든 하찮고도 어리석은 기록들-모든 격언들, 모든 생가들, 모든 인상들=을 모조리 지워버리는" 일이다. '나'라는 자아를 없애는 일이 주어진 복수를 실행하는 길이다. 햄릿은 성찰하는 인간이다. "내적 반성은 우리 모두를 겁쟁이로 만들며, 이리하여 결심의 본색은 우울이라는 창백한 색으로 덮여서 지고의 중요한 거사들은 이로 인해 노선이 바뀌고, 실행의 이름조차 잃게 된다."
그러니 햄릿을 우유부단하다고만 할 수 있을까? 누구나 당연하게 여기는 일에 질문을 던진다는 사실 자체가 혁명적이다. 그는 시대를 앞서간 특출난 개인이자 선택의 기로에 선 우리들에게 선구자이다. 당시의 "To be or not to be"는 낯선 질문이었겠지만 우리 시대엔 일상적인 일이라서 낯설지 않다. 아주 작은 문제에서부터 큰 문제에 이르기까지 늘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 누군가 절대적인 도덕과 가치관을 제시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당시는 햄릿이 별난 인간이었겠지만 우리 시대의 개인은 모두 햄릿에 가깝다.
왜 해야 하지? 주로 이런 질문을 가진 채 독립적인 10대와 20대를 보냈다. 옳든 그르든 스스로 선택했다. 누군가 관습대로 할 것을 강요하지 않았다. 이런 자아가 난관에 봉착한 것은 결혼, 시월드였다. 누구나 시월드에선 <햄릿>이 된다. "To be or not to be"? 왜 해야 하는가? 응? 이런 상황에 끼인 남편도 시월드에선 다른 의미에서 햄릿이다. 늘 성찰하고(눈치보고) 고민하고 선택해야 한다.
시댁의 요구 앞에 관악산 햄릿(남편)의 대답은 "보고요"였다. 이 보고요가 몹시 답답했지만 선택 앞에 놓인 인간에게 보류란 자연스럽고 현명해보이기까지 한다. 저얼대 우유부단하지 않지! "주말에 집에 온나" "보고요" "고모집에 가야 하는데 시간 되나?" "보고요"
햄릿 아버지 혼령 : 복수 해줄수 있나?
햄릿 : 보고요.
햄릿에게 필요한 건 융통성이었지 실행력이 아니었을 지도! 이 보고요가 얼마나 찰떡인지 내 입에도 딱 붙었다. 아이들의 별별 요구사항에 확답하는 건 올가미가 된다. 집요함에 시달리지 않기 위해 쓴다. "보고" "엄마 주말에 놀이 동산 가요"에도 "과제 마치면 햄요리 해주세요" "엄마 다 하고 할머니 집에 가도 되요"에 모두 "보고"다. 애들도 적응했는지 그걸로 더이상의 요구는 없다. 아마 아이들도 좀 보고 있는 거겠지. "보고요"적 인간은 대물림될까?
선택은 늘 어려운 숙제다. 하지만 어쩌랴. 우리는 자유를 누리는 대신 숙고해야 하고 선택해야 한다. 온전히 홀로는 아니기에 또 타인과 교류하고 의지하면서 말이다. 불현듯, 내 선택에 개입해왔던 타인의 관습들이 꼭 나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늙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