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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을 Mar 02. 2023

자의식 과잉이 불편한 당신에게

<달과 6펜스>


"스트릭랜드보다 더 단일한 정신을 가진 사림이 어디 있을까. 그처럼 자의식이 없는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달과 6펜스>> 중에서




 달과 6펜스의 찰스 스트릭랜드를 가장 단순하게 표현한다면 "자의식이 없는 사람"이 아닐까. 무려 예술가다. 자의식이 없는 예술가라니 형용모순으로 느껴진다. 가수 김윤아는 자의식 과잉이라는  세간의 비판에 이렇게 말했다.  "음악을 만들고 동시에 연주하는 자들은 원래 모두 자의식 과잉이다. 음악이건 미술이건 무용이건 문학이건 표현하는 일을 하는 자들은 모두 같다." 예술가가 내놓은 열매는 자의식 과잉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자의식이 없는 예술가"라니. 


서머셋 몸은 고갱의 일생을 소설로 쓰기 위해 타이티까지 여행했을 정도의 열정을 보였지만 고갱의 캐릭터를 있는 그대로 그리지는 않았다. 그의 극적인 삶과 예술이 저 세상 멘탈을 가진 이상만을 좆은 예술가에 대한 영감을 주었던 것일 테다. 실제 고갱은 스트릭랜드보다 유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타히티에 가 있으면서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했고, 그곳에서 그림을 그렸지만 정서적으로 동화되거나 정착할 만한 동기를 가졌던 것 같지 않다. 스트릭랜드의 야성적이고, 자신을 돌아보고 인식하는 자의식이 없으며, 희박한 도덕 관념은 서머셋 몸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세상과 동떨어져 진실을 추구하는 예술가에 대한 환상을 반영한 것이다. 아주 단순하게도 그도 나처럼 자의식이 과잉된 세계에 몸담고 있어 지쳤던 것일지도 모르겠고. 세속과 예술의 경계에서 방황하는 예술가를 극단으로 몰고가 보는 고약한 취미는 자신 안에 있던 거친 욕망이었을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스트릭랜드를 이해하기보다 서머셋 몸의 그런 욕망을 이해했다.


오랫동안 "자의식이 없는 사람", 또는 자의식을 웬만해선 드러내지 않는 사람을 흠모해온  나와 같은 사람이 있다면  <달과 6펜스>의 스트릭랜드에게 흠뻑 빠져들게 될 것이다.  "자의식"을 쉽게 말해 자신의 경험을 관찰하고 의식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스트릭랜드는 자의식이라고는 없는 인간이다. 그림을 그리는 일에 전념을 다하지만 평가에는 의연하며 심지어 보여줄 생각조차 않는다. 생명을 구해준 스트로브의 부인을 빼앗았다가 속박을 견디지 못하고 스트로브의 부인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죄책감이라고는 없다. 타인에게 동정심이 없다면 자신에게도 동정심이 없다. 이런 공평함은 자의식이 없어야만 가능하다. 이런 경지가 놀랍고, 꼭 한 번 실제로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스트릭랜드 같은 사람을 현실에서 만나면 상처 받을게 뻔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데미지가 크다. 쉬운 예를 들면 예쁜 척하지 않는 예쁜 여자,  예쁘다는 자의식이 없는 여자는 참으로 예쁘지만 반대라면 느끼하고 지루하다. 자의식이 과잉된 사람은 대체로 정해진 답을 원했으므로, 함께 있는 시간을 견디기가 무척 어렵다. 자의식을 과감히 드러내는 사람 앞에서 상대가 원하는 답을 영혼 없이 해줄지 모른척 할지 수시로 선택해야 한다. 나의 경우엔 젊은 땐 모른척 했고 나이가 들수록 영혼 없이 과감하게 칭찬 유전자를 폭발시켰다. 자신이 특별하다는 자의식은 사소한 것에도 의미부여를 함으로서 상대를 피로하게 하는데, 나는 이런 유형의 인간들이 갖는 상투성과 지루함을 두려워하는 편이다.  서머셋 몸도 나와 같은 부류였다고 믿는다.


자의식에 관해서는 또다른 불편함이 있는데, 드러내는 게 부끄럽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나는 글을 쓰고 싶다던가 하는 식의 말조차도 부끄러워했는데, 앙리 루소의<myself>를 보고 난 뒤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다. 서툰 솜씨로 이토록 명랑하고 솔직하게 자기 자신을 만천하게 드러내는 천진함이 마음을 끌었다. 이 정도라면 얼마든지 자의식을 표현해도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고, 상대에게 부담없이  자의식을 나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나는 가끔 나는 글을 쓰고 싶다던가, 작가가 꿈이라는 이야기를 조금씩이라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말로 해야 하니 그림 속 루소보다 조금 덜 돋보이게! 게다가 아직 작가는 아니니까. 


앙리 루소<myself> 


앙리 루소의 그림에서 느낀 바대로 자의식을 드러내고 받아들이는 쉽지 않다. 대체로 꼴불견이다. 타인이 드러내는 과한 자의식을 나는 어떻게 수용해야 할지, 종종 과잉되는 내 자의식은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여전히 고민하고 있다. 타인의 경우라면 "과잉도 한때다"로 버틴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도 인간이 늘 비약적인 발전을 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법이다. 그러니 초반 과하게 흘러드는 뉴스들에 지치지 말고 시간을 두고 관계를 맺어가는 것이 방법이라고 나와 같이 자의식 과잉의 세계에서 지쳐가는 이들에게 전하고 싶다. 요즘처럼 손절이 일상인 세계에서라면 통하지 않겠지만 손절이 답이 아니라고 느낀다면 시간이 답일 것이다. 그 사이 나도 느리게나마 성장한다면 말이다. 내 자의식 과잉이 일을 저질러 이불킥을 날리고 싶다면? <달과 6펜스>를 읽고 스트릭랜드의 끝간데 없는 쿨함에 경의를 표하고 한 장면이라도 몸에 배게 해본다. 쓰고 보니 자의식 과잉인 타인에게 전할 처방전으로도 좋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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