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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을 Jan 02. 2024

오필리어의 그림자

<햄릿> (셰익스피어)를 읽고


Ernest Hebert, 1910


셰익스피어로부터 약 2000년 전의 그리스 비극 속 여성들은 끝간데 없는 주체성의 소유자들이었다. <메데이아>는 이아손을 돕기 위해 아버지와 오빠들을 버렸고, 아이손의 배신을 알고 복수하기 위해 아들 둘은 물론 이아손의 새 애인과 그 아버지 테바이의 왕 크레온까지 죽였다. <엘렉트라>에서 클리메이스트라는 정부와 함께 전쟁에서 돌아온 아가멤논을 죽였고, 딸 엘렉트라는 동생을 부추겨 엄마를 살해했다. 오빠 폴뤼네이케스의 장례를 금지하자 왕에게 반대하며 목숨을 걸고 오빠의 장례를 치르는 <안티고네>의 안티고네까지. 21세기의 나도 쎈 언니들에게 위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내가 아는 한 가장 용감하고 지혜롭고 독립적인 안티고네가 태어난지 2000년이 지난 1600년경 <햄릿> 속 여성들은 작가의 말대로 "약한 자여 그대 이름 여자라."에서 머물고 있다. 줄리엣만 봐도 이렇게까지 존재감이 없지는 않던데, 다른 작품  속 여성들도 이처럼 수동적이지는 않다는데, <햄릿> 속 거트루드와 오필리어, 이 두 여성 캐릭터의 완벽한 퇴보에 할말을 잃었다. 오필리어의 유명세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지? <햄릿>의 오필리어가 모티브가 된 작품들은 오필리어의 어떤 점에 주목했던 것일까?  <햄릿>에서 오필리어가 등장하는 장면을 통해 살펴보자.


오빠 레어티즈 : 햄릿의 애정을 무시하고 몸값을 높여.

오필리어 : 너나 잘하시지요.


아버지 : 햄릿과 거리두기. 편지가 오면 내게 전달. 몸값을 높여.

오필리어 : 네.


햄릿 : 다치지 않게 수녀원으로 가시오. 몸값 중요.

오필리어 : 그동안 참 달콤했는데...미치셨어.


햄릿 어머니 거트루드 : 아름다운 네(몸값 최고인 네가)가 며느리가 될 줄 알았는데.....미치다니.

오필리어 : 아무 노래.


초간단 요약본에 따르면 오필리어를 둘러싼 인물들은 모두 기승전 외모와 몸값 타령이다. 세상 멋진 남자로 나오는 오필리어의 오빠 레어티즈도 햄릿의 꼬드김을 경고하며 유학길에 오른다. 덴마크의 가신이자 오필리어의 아버지 폴로니어스는 오필리어에게 햄릿과 거리두기를 종용하며 햄릿에게서 오는 편지까지 검열한다. 여기에 "네"라고 대답하는 오필리어라니. 햄릿도 제 복수를 미루기에 바빠서 미친 척하느라 오필리어를 희롱하는데 오필리어 위축될 뿐이고. 아버지가 칼에 찔려 죽자 오필리어는 곧바로 미치고 만다. 이 나라에서 아버지가 억울하게 죽으면 선택지는 복수하거나 미치거나 둘 중 하나뿐인가.


하지만 생각해보자. 오필리어는 준비된 가정에서 자랐다. 정숙을 최고의 과제로 알고 자라왔고 지켜왔다. 고난이라고는 없이. 갑자기 아버지가 죽었고 오필리어는 미쳤다. 여기에 개연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녀의 성장과정이 철저히 통제당하고 있었고 얼마나 순종적인 딸이었는지를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오필리어에겐 아버지가 살해당했다는 최초의 시련을 견뎌낼 멘탈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이런 오필리어의 사례가 우리 시대의 여성들을 떠오르게 한다.


최근 <딸이 조용히 무너지고 있었다>의 저자 인터뷰를 보았다. 20대의 딸이 양극성 장애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자립하려고 노력한다는 이야기였다. 이런 질환에 남탓이나 내 탓을 하지 말 것, 스펙트럼이 워낙 넓어서 정상과 비정상이 모호하다는 것, 넓은 스펙트럼의 장애, 다양한 환경의 정신질환자들이 자립해서 자연스럽게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 등이 이 인터뷰의 골자이다.


문제는 이 인터뷰 기사에서 언급된 20대 여성의 우울과 자살이 급격하게 늘었다는 몇 줄이었다. 이 몇 줄 때문에 기사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20대 여성은 사회 부적응자로서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공격성 댓글들이 달렸다. 이 기사 뿐만이 아니라 최근 기사들에서 여성의 우울과 자사률이 급격히 증가했다는 점을 언급했다. 분명 사회적 이슈가 되었지만 대중은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페미니즘을 남녀로 구분해 사고하는 건 이미 시대착오적이다. 그 안에 수많은 결들이 단순한 이분법을 허용하지 않는다. 여학생과 남학생이 다르고, 남자 여자가 다르다. 결이 조금만 달라져도 상대적인 약자는 달라진다. 여자라고 무조건 약자가 아니다. 계급이 다르면 남녀의 지위도 달라지게 마련이고 말이다. 단순히 힘의 우위, 가부장적 체제 아래에서의 여성과 남성으로 차이와 차별을 판별하기엔 세상에 복잡해졌지 않은가.


이런 문제보다 딸을 키우고 있는 입장에서 딸의 자유와 억압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오필리어는 미친다. 미치고 나서는 어느 곳이나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자신의 몸값과 상관없이 노래한다. 오필리어는 미치고 나서야 본인다워진 게 아닌가 착각을 일으킬 정도다. 하지만 이토록 자유롭도록 미치도록 두지 않는 게 딸의 양육 과정이 아닐까.


가정에서 딸의 지위는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와 판이하게 다르다. 딸은 키우기 수월한 존재로 정의된다. 성적으로 보면 남자아이들은 여자아이들 밑을 깔아주는 존재로 전락했다. 딸은 부모와 밀착되어 성장한다. 말도 잘 듣고 야무지게 자기 일을 해나가기 때문이다. 말 안듣고 제 멋대로인 아들과는 다르다. 특히 육아의 주체인 엄마와 딸의 친밀도 때문에 딸들은 어쩌면 사춘기를 맞아 독립하는 일 없이 성장기를 마무리짓기도 한다.


사회에서 딸은 더이상 가정 내의 딸의 지위를 누릴 수 없다. 여성으로서 사회생활을 하면 남자와 비슷한 위치에서 자기 길을 헤쳐나가야 한다. 늘 응원하던 부모도 없고, 학창시절의 우선권도 없다. 학교와 가정에의 성취화 지위가 보장되는 사회가 아니다. 사회 생활에서 자존감이 무너질 때 버텨줄 삶의 동기는? 어쩌면 부모와 주변의 칭찬과 욕망을 내재화하면서 이끌어온 삶이라면 사회의 냉혹한 대접 앞에서 자기 동기를 잃기가 쉬울 것이다. 남자라도 딸과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다면 비슷한 상황에 놓이겠지만 딸은 이런 상황에 처할 염려가 더 높아 보인달까. 이런 양육 문화가 한국의 20~30대 여성의 자살률을 높이는 게 아닐까.


핵가족화가 급격하게 진행되면서 딸의 지위가 높아진 만큼 딸은 가정 안에서 자기 가능성의 한계를 명확히 하며 자라는 게 아닐까 오히려 의심스럽다. 성장기 동안 부모에게 스크래치를 내고 독립하려 애 쓰는 아이는 오히려 사회에서 잘 적응하는 듯 보일 정도다. 부모에게 상처주지 않고 무난하게 부모와 학교에서 순응하면서 자란 딸들도 사춘기 동안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고 자신 답게 행동하는 시기를 거쳐야 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그럴 필요를 못 느끼며 자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면 억지로 사춘기로 끌어들일 수는 없는 거겠지. 그래서 어느 순간 무너지는 게 아닐까.


<딸이 조용히 무너져 있었다>의 딸도 "조용히"에 핵심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딸들의 반항과 독립은 요란스럽지 않고 조용히 어느 순간 무너져버려서 더 안타깝고 마음 아프고 해결의 시기를 놓쳐버리는 게 아닐까.


우리 시대는 셰익스피어의 시대로부터 멀리 왔다. 부모의 업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기 위해 노력해왔다고 생각한다. 부모의 복수는 고민의 대상이 아니라 숙명이었던 햄릿도 복수를 미루고 싶어 고민한다. 자기 자신의 삶을 살고 싶어 한다. 당시엔 누구도 "너의 삶을 살아라"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홀로 괴로운 햄릿. 우리 시대는 그로부터 얼마나 멀리왔을까? "너의 삶을 살아라."라고 아이를 놓아주어야 할 선택지 앞에서 우리는 햄릿처럼 미루고 또 미룬다. 특히 딸들에겐 더더욱. 오필리어의 그림자가 길고 짙다.


그럼에도 오필리어의 그림자를 밟고 서 있는 우리 시대의 딸들에게  더 자유를 주고 딸들을 독립적인 자아로 자라도록 독려하는 양육자를 그려본다. 요즘 이 일이 나의 과제이기도 하다. 자기 삶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아이를 만드는 게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라서 무척 어려운 과제이지만 조금씩 조금씩 아이의 과거와 이별하며 나아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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