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 지드 지음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학교로부터 방학과제를 받았다. 책을 읽고 주인공에게 편지 쓰기, 2편. "제로옴에게"로 시작하는 편지가 아직도 뚜렷하다. 제로옴의 사랑에 마음이 저렸던 중딩은 그에게 공감하며 위로하는 편지를 썼다.
학창시절 사랑 이야기에 눈물을 흘린 두 편의 소설 중 하나는 제로옴이 등장하는 <좁은문>이 있다. 다른 하나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을 절대적인 사랑, 적극적인 남자, 사랑받는 여자, 아름다운 편지, 쓸쓸한 죽음. 소녀를 뒤흔드는 낭만적인 사랑 소설의 모든 것을 갖추었다.
중년이 되어 두 편의 사랑 이야기를 다시 읽는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이사야 벌린의 <낭만주의의 뿌리>랑 함께 읽으니 소설의 맥락에서 읽었다. 감정은 평온했다. 혼란한 주말을 보내서인가 <좁은문>은 마음의 혼란을 증폭시켰다. 다시 사랑 때문에 아릴 나이는 아닌데 이 소설은 대관절 왜 이렇게 마음을 아프게 할까.
소설은 지드의 경험이다. 지드는 2살 위의 사촌 누나 마들렌과 사랑하고 결혼하고 오랜 시간 별거했다. 제롬이 사랑하는 알리사는 2살 위의 외사촌 누나이다. 둘은 이미 14살의 어린 나이에 굳건한 사랑을 확신한다. 모두 응원한다. 제롬의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직전 알리사와 결혼할 것을 부탁한다. 자타공인 절대적 사랑, 이후 인생에서 '사랑'에 합당한 감정은 그때의 감정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이 사랑이 두 사람을 신에게 가까이 가도록 자신의 덕성을 고양시키도록 이끌었으나 둘을 가까이 가도록 이끌지는 못했다.
"주여! 제롬과 제가 서로 함께, 서로에게 이끌려 당신께 나아가도록 해 주옵소서. 이따금 ‘형제여, 피곤하면 내게 기대시오’라고 하나가 말하면 다른 하나가 ‘그대가 곁에 있다고 느끼는 것만으로 충분하오. ’라고 대답하는 두 순례자처럼, 그렇게 끝까지 인생길을 걸어가게 하옵소서. 아닙니다! 주여, 당신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길은 다만 좁은 길, 둘이서 나란히 걸어가기에는 너무도 좁은 길이옵니다."
순례자처럼 곁에 있는 '느낌'으로 충만함을 고취시키는 알리사는 제롬을 밀어내고 제롬은 좌절한다. 알리사가 죽고 알리사의 일기를 통해 그 사랑을 이해하는 제롬.
요즘 읽으면 그냥 고구마 100개(국물 제공 불가) 연애다. 알리사는 제롬의 사랑이 자신을 우상화한 것은 아닌지, 자기애에 불과한 것인지 알고 싶어한다. 우리 시대로 치면 자존감이 바닥이어서 타인의 사랑을 못 믿는 경우라든지, 어딘가 못 미더워서(경제적 심리적) 썸만 타고 만다든지, 하는 경우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신을 향한 믿음의 세계는 이해불가다. 신이 사랑의 방해꾼인가, 사랑을 감당못한 관념적 자아가 방해꾼인가.
그밖에는 어떤 방해물도 없는 사랑이다. 좁은 구역에서 시작해서 좁은 길로 쭉 가면 되는 사랑. 우리 시대는 광야에서 시작해 때로 땅에서 솟고 하늘에서 떨어진 대상과 좁은 곳에서 만나 살아간다. 그러니 미칠 노릇인데, 좁은 데서 시작해서 닦아놓은 익숙한 길을 걸어가는 게 뭐 그리 어려운가? 둘의 사랑은 어처구니 없게도 땅으로 꺼지고 하늘로 솟는 형국이다. 잃고 싶지 않으니 간직하고만 싶은 심정, 전혀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
마음을 혼란스럽게 한 건 제롬을 어릴 적부터 사랑한 알리사의 동생 쥘리에트다. 쥘리에트도 알리사와 제롬처럼 사랑의 힘으로 자신을 키워왔다. 제롬을 따라 이탈리아어를 배워 단테의 시를 읽는 것처럼. 제롬은 알리사보다는 쥘리에트 앞에서 더 자연스럽다. 그들에게 넘치는 친밀감이야말로 연인의 것이다. 알리사와 제롬 사이엔 이런 자연스러운 친밀감이 없이 숭배하는 사랑이다.
알리사는 동생의 마음을 알고 제롬을 밀어내지만 이 희생을 달가워할 쥘리에트가 아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농장주의 아내가 되어 떠난다. 사랑 없는 결혼이지만 행복하다고 전해진다. 알리사가 죽으면서 물려준 가구로만 채워진 쥘리에트의 고요한 방. 여섯째를 막 낳은 쥘리에트와 제롬이 나란히 앉았다. 쥘리에트가 묻고 제롬이 답한다.
"내가 오빠를 바로 이해한 거라면, 오빠는 알리사의 추억에 충실하려는 것 같은데."
(......)
"아마도 그보다는, 나에 대한 알리사의 생각에 충실하려는 거겠지. 아니, 그렇다고 내가 무슨 장한 일이나 한다고 생각하지는 마. 나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만약 내가 다른 여자와 결혼하더라도, 난 그 여자를 사랑하는 척할 수밖에 없을 거야."
(......)
"그렇다면 아무 희망도 없는 사랑을 그토록 오랫동안 마음 속에 간직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래 쥘리에트."
"그리고 날마다 삶의 거센 바람이 불어닥쳐도, 그 사랑이 꺼지지 않으리라고 생각해....."
(......)
나는 그녀가 일어나 한 걸음 앞으로 내딛더니, 기운이 다 빠진 듯 곁에 있는 의자에 다시 주저앉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울고 있는 것 같았다......(207-8, 민음사)
제롬이 묻고 쥘리에트가 답했다고 해도 달라지지 않을 대화. 제롬의 대답은 쥘리에트의 대답이기도 하다. 쥘리에트의 자문자답이라고 봐도 좋을 대화. 대답은 모두 같다. 제롬은 그녀가 왜 우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의 사랑과 판박이인 쥘리에트의 마음을 오래전 그때처럼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다. 그 점이 쥘리에트를 고통으로 몰아넣었을 테지. 쥘리에트는 "아무런 희망도 없는 사랑을 오랫동안 마음 속에 간직"한 채 "날마다 거센 바람이 불어닥쳐도 그 사랑이 꺼지지 않아"서 운다. 그치지 않을 것을 알아서 무너진다.
기대가 스러지는 순간, 변하지 않을 자신 때문에 힘겨운 쥘리에트. 이 대화로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할 일상. 이 혼란과 무기력......아마 이것이 나의 밤잠을 설치게 한 주범인가. 확실한 건 어릴 적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베르테르보다는 제롬이라는 것. 아니 베르테르보다 제롬, 제롬보다 쥘리에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