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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을 Jan 05. 2024

<프랑켄슈타인> 과학은 어디에?

퍼시 비시 셸리, 프랑켄슈타인의 낭만성


<프랑켄슈타인>은 여러 모로 독자에게 좌절감을 안긴다. 이 작품을 메리 셸리 19세의 나이에 완성했다는 점, 피조물이 딱 세권의 책을 읽고 이토록 차원 높은 지적 존재가 되었다는 점. (실낙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이 책을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는 점, 읽고도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점, 앞으로 읽고 죽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점, 점점점....! 일단 프랑켄슈타인부터 이해하고 넘어가야 하겠지만.


프랑켄슈타인의 작가 메리 셸리의 남편 퍼시 비시 셸리는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시인이었다. 그의 시는 책 속에서 두 번 인용된다. 북클럽 3학년 수업 시작은 시를 읽으면서 시작한다. 그날의 시를 읽고 시로 대화한다. 시는 수능 기출에서 가져오기도 하고, 시다운 밥 딜런의 가사를 읽기도 한다. 오늘은 퍼시 비시 셸리의 시를 읽었다. 프랑켄슈타인이 언급한 시다. 


무상

                       -퍼시 비시 셸리          

우리는 한밤중의 달을 가리는 구름 같네,

끊임없이 달리고, 반짝이고, 떨면서,

어둠을 가로지르며 빛나네!  - 그러나 곧

밤이 모든 것을 감싸고, 영원히 사라지네.  

   

또는 잊힌 현악기 리라 같네, 조율되지 않은 현들은 

변화하는 바람결마다 제각각의 소리를 내네.

그 연약한 악기는 어떤 두 번째 선율도

앞선 선율과 같은 음색과 음조를 만들 수 없네.  

   

우리는 휴식하네 - 꿈은 잠을 괴롭히는 독이 될 수 있네,

우리는 일어나네 - 종잡을 수 없는 생각은 낮을 오염시키네.

우리는 느끼고, 생각하고, 분별하고, 웃고, 우네,

슬픔을 다정히 껴안거나, 근심을 내다 버리네.    

 

그 모든 것이 마찬가지이네! 기쁨이든, 슬픔이든,

그 떠나는 길은 여전히 열려 있으므로,

사람의 어제는 결코 그의 내일과 같을 수가 없으니,

영원히 변한다는 사실만이 영원할 뿐이네.


번역 출처(짧은 영시 (17-7) 퍼시 비시 셸리 / 우.. : 네이버블로그 (naver.com))


소설보다는 이 블로그의 번역이 더 시적이고 분명하다. 소설은 이 시에 덧붙인다.


"아! 어째서 인간은 짐승보다 훨씬 우월한 감수성을 가졌다고 자랑하는 것일까? 그로 인해 훨씬 더 유약하고 의존적인 존재가 될 뿐인데. 우리가 욕망이 굶주림, 갈증, 그리고 성욕에 국한되었다면, 거의 완전한 자유를 만끽하는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바람 한줄기, 우연한 현마다, 아니면 그 말로 전달되는 풍경 하나하나에 흔들리지 않는가."(<프랑켄슈타인>문학동네, 123쪽)


프랑켄슈타인의 성격은 매리 셸리 남편의 성격을 반영한 게 아닐까 싶네. 이 시와 시에 덧붙여진 글에서만도 프랑켄슈타인의 당시 심정과 성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아이들은 찾기 어려워했지만 그래도 찾게 한다. 


당시엔 과학자라는 말이 없어서 소설에서는 이들은 "철학자"라고 부르지만 현대적으로 과학자의 역할을 하고 있으므로 프랑켄슈타인은 과학자이지만 태도에 서는 과학자라고 할 만한 데가 없다. 낭만주의자에 가까워보인다. 인류에 공헌하고자 하는 마음을 먹고 피조물을 만들고, 피조물에게 아름다움을 기대한다. 흉측함에 실망한 채 도망가고 동생의 죽음에 분노하지만 다시 그의 선함을 보고 이브를 만들기로 한다. 하지만 다시 없애고, 복수를 위해 목숨을 건다. 복수 말고 할 것도 없다. 그마저 안 하면 그냥 죽어야지. 비로소 둘의 삶이 서로의 삶에 동기가 되었다. 슬프게도. 


처음 이 글을 여는 월턴은 자신의 북극 탐험이 순조롭지만 계속해서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가 있다며,  "친구"가 없는 점을 꼽는다. 그 이야기를 고백할 때마다 그는 "낭만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라는 어딘지 모르게 수줍은 말을 덧붙인다. 아마도, 탐험을 떠나는 이들에겐 낭만적 동기보다 과학적 방법에 따라 과학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편이 더 설득력이 있고 선구자처럼 보였던 걸까. 당시는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의 시대로, 과학과 이성의 신화가 싹텄을 때가 아닌가. 그러니 "낭만적"이라는 건 철없어 보이는 감정 쯤으로 여겨졌던 모양이다. 


하지만 "낭만적" 동기 없이 어떻게 사람이 우주로 나아갈 수 있었겠나. 과학도 알고 보면 이런 낭만적인 감수성에 기대고 있는 거 아닐까. 프랑켄슈타인처럼. 하지만 동기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자신의 크리쳐 이후를 책임질 능력이 되는지 모르겠다. 이후 대처 능력에서 한계를 금방 드러내지 않나. 곧바로 죽음을 떠올리고 자기 감정으로 빠져들어 버린다. 여기선 과학자의 뻔한 태도를 논하기 보단 과학자로서 낭만적 성격을 지닌 프랑켄슈타인, 과학 소설인 듯 낭만 끝판왕인 메리 셸리의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는 편이 매력적이다. 


아이들은 질문을 낯설어 한다. 하지만 마음껏 질문하길 권한다. "왜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이 정상적으로 말하는 걸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있었는가?" "어떻게 시체를 움직이는 피조물이 썩지 않고 움직이는가." 등등도 질문이 되냐니, 얼마나 소중한 질문인데. 이런 질문을 통해 이 소설은 왜 이렇게 개연성이 개판인가에 대해 우리는 진지하게 토론할 수 있는 거지.


아이들이 질문의 가치를 깨달아 가길. 세상은 온통 질문으로 이뤄져 있다. 질문을 통해 사고가 시작되는 거란다. 이해가 시작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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