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에르노는 대학 시절 임신과 불법 낙태를 경험한다. 이 경험을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하기로 한다. 아니 에르노가 원래 자신의 경험만을 직설적이고 날카롭게 쓰는 작기이므로 이 책도 예외는 아니다.
새생명의 입장에서 보수적인 입장에서 생각하면 낙태는 상실, 죄책감과 동의어이겠지만 낙태가 누군가의 인생을 구원하고 새 인생을 살도록 재탄생을 의미한다면? 나의 구원자는 불법 낙태 시술자이고, 구원의 기원은 벌법 시술 낙태 정보를 준 아무개라면, 그 신성의 줄기를 우리는 어떻게 따라가야 할까?
"내 다리 사이로 검경을 집어넣고 분주히 움직이던 여자가 나를 태어나게 하려는 것 같다. 바로 그 순간 나는 내 안에서 내 엄마를 죽였다."
저자는 낙태함으로서 다시 태어났고 내 엄마를 죽였다고 한다. 죽은 아이가 곧 내 엄마다. 아이를 죽임과 동시에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한 엄마를 죽였다니. 역설이고, 기존의 사고를 전도하는 문장이다. 낙태는 저자에게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 사건이다. 다른 여성들에게도 가능한 것 아니겠는가. 대단한 문제는 아니다. 살아 남았고 선택할 수 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그것은 다른 선택이나 경험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 경험이 특별해지는 건 과정 때문이다. 미혼모는 사회적 낙인이 찍히고, 부모와 남자친구와 갈등해야 한다. 자신의 인생괴 커리어를 무너뜨리는
일이다. 낙태는 불법이고, 사회적으로 지탄의 대상이며, 또한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상태, 도와줄 이가 턱 없이 부족하고, 목숨을 걸어야 하기도 한다. 특별하지 않은 일이 되기엔 과정과 배경이 지나치게 특별하다. 그러므로 이 경험을 갖가지 편견에서 벗어난 '사건'으로 대할 수 없다.
이런 사건을 격지 않으면 더 좋다. 임신이 도덕적, 현실적 책임을 여자 혼자 져야 하는 사회적 폭력이라면 낙태는 구원이겠지. 임신이 어느 시기에 찾아오건 책임을 나누고 사회적 살인을 감당하지 않아도 된다면 축복이겠고. 답은 명확하다. 이걸 보장하지 않고 낙태를 죄라거나 불법이라고 하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생명권, 생명의 소중함은 다른 문제다. 현재 살아아고 있는 생명의 자기 선택권 앞에서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장담할 수 없는 생명은 경시될 수밖에 없다. 그것을 생명 경시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을 테지만 지금 살아 움직이고 선택하는 생명에게 단죄하고 권할 일은 아니다. 생명은 어째서 잉태된 상태에서만 더 소중한 것일까? 이미 태어난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편이 더 양심적이고 효율적이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분노나 혐오감을 자극할 수도 있을 테고, 불쾌감을 불러일으켜 비난을 살지도 모르겠다. 어떤 일이든 간에, 무언가를 경험했다는 사실은, 그 일을 쓸 수 있다는 절대적인 권리를 부여한다. 저급한 진실이란 없다. 그리고 이런 경험의 진술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는다면, 나 또한 여성들의 현실을 어둠 속으로 밀어 넣는 데기여하는 셈이며, 이 세상에서 남성우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왜 여성의 쓰기는 그 자체로 역사가 되는지 잘 보여준다.
"그저 사건이 내게 닥쳤기에, 나는 그것을 이야기할 따름이다. 그리고 내 삶의 진정한 목표가 있다면 아마도 이것뿐이리라. 나의 육체와 감각 그리고 사고가 글쓰기가 되는 것, 말하자면내 존재가 완벽하게 타인의 생각과 삶에 용해되어 이해할 수있는 보편적인 무엇인가가 되는 것이다."
글은 왜 쓰는가.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인 무언가가 되는 사건으로서 독자에게 다가가기에 충분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