맡겨진 소녀는 셋째다. 아일랜드의 어느 시골 마을에 사는 조용한 소녀는 두 언니와 남동생 1명과 곧 태어날 남동생, 엄마 아빠를 가족으로 두었다. 형편이 어렵고 보살핌을 받지 못해 친척집에 여름 한 철 맡겨진다. 식구 많은 집에 있을 법한 사연이다. 나는 다섯째 중 넷째로 태어났다. 딸 넷에 아들 하나. 형편이 어렵다면 셋째 딸 정도면 입양 보내도 되지 않나 싶지만. 엄마는 그렇지 않다고 단호히 말할 것이다. 우리집에도 깜찍하고 예쁜 셋째를 키워주겠다던 친척이 있었지만 엄마는 어려운 형편은 고려할 필요도 없이 "no"였다.
말없는 어느 집의 셋째가 먼 친척집에서 보낸 여름은 찬란했다. 조용히 젖어들어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가족에게 돌아가는 날은 임무를 마치려 조용히 고군분투했지만 대문을 나서는 여름의 아빠를 부등켜 안고 오열하는 장면을 비껴갈 수는 없다. 손한 번 잡아주지 않은 생물학적 아빠보다 손 잡고 따뜻하게 안아주는 한 여름의 아빠가 더 아빠같다고 느끼는 건 작가나 소녀나 나나, 같다.
서로를 길들이는 과정에는 절대적 결핍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어떤 미담을 들을 때, 길들여진 결과가 아름다울 때 볼록한 면을 들고 오목한 곳을 찾는다. 소녀가 보낸 시간은 친척집에 아들이 죽은 빈 자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다른 이유가 없지는 않겠지만 작가는 이 장치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엄마가 알던 현실은 아들만 셋 있는 집의 구석진 자리였다. 딸을 보내지 않은 건 모성이 우선했겠지만 엄마의 볼록한 면이 오목한 곳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말없는 소녀는 언제나 오정희 소설 <새>의 소녀로 돌아온다. 그 아이는 아직도 나의 소녀다. 폭력적인 아빠 때문에 어린 남매를 두고 떠난 엄마. 아빠와 떨어져 친척집을 전전하는 동안 버려지고 상처받는 어린 남매. 아빠의 애인이 떠나고 아빠마저 떠난 자리엔 동생의 죽음이 자리한다. 나의 소녀는 구원받지 못한 채 떠돈다.
아일랜드의 소녀가 친척집에서 서로의 눈을 지긋히 바라보는 동안 나의 소녀는 외숙모에게 맡겨져 “저 눈깔이 나를 미치게 할 거야”라는 말을 듣는다. 아일랜드의 소녀가 농장의 넓은 마당을 달리는 동안 나의 소녀는 골목을 떠돈다. 아일랜드의 소녀가 글을 배우는 동안 나의 소녀는 매일 악을 쓰며 학교를 다녀야 하고 동생의 구구단 학습을 도우며 구타를 일삼아야 한다. 도시의 달동네엔 온기란 없다. 나의 소녀가 햇살 눈부신 방에서 산뜻한 바람을 맞으며 오목한 낮잠을 잘 일이란 일어나지 않는다.
나의 소녀 이야기를 하고 보니 아일랜드의 소녀는 어느쪽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아일랜드의 소녀는 일곱 식구의 집에 머물게 될까, 그토록 원하는 친척집에 가게 될까? 넷째의 입장에서는 어쩐지 셋째 언니가 마냥 부러울 것만 같다. 셋째 언니는 친척집에 살지 않더라도 앞으로도 언제든 환영받을 친척을 두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넷째는 또 괜찮다. 그런 걸 쉽게 잊고 자기 일에 몰두하는 성격을 지녔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