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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을 Jan 14. 2024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작년에 <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까지 읽으면서 다시는 인문학자 및 소설가들의 유대인 이야기는 읽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아마 기회가 없으리라 생각했다만, 독서모임 추천도서라서  읽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정신과 의사가 쓴 기록이기도 하고.


이젠 인문학자 소설가에  의사까지 추가. 아니 유대인 홀로코스트 글은 읽지 않을 작정이다. 새롭지 않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부럽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의 피해 기록은 유대인들을 갈등으로 몰아가지 않는다. 공동의 집단 기억이다. 유대인의 학살은 길어야 6년이지만 우리는 거의 30년 가까이 식민지를 겪었고, 민족 내전도 겪었다. 더 끔찍하고 비인간적인 일이 유대인보다 더 많을진대 그와 비슷한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 자신의 수용소 경험에서 지적 사유를 끌어내는 글도 없고,  이렇다할 공동의 기억도 기록도 없다. 겨우 위안부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오나 했더니 이념 전쟁으로 꺼지고 있다.



왜일까...?

식민지 경험이 무차별적인 공동체의 경험이 아니다. 그러니까 낮은 계급의 사람들이 식민지 기간동안 더 처절하게 고통받았을 것이다. 글을 쓰고 사유할 계급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엘리트들의 친일활동과 독립활동이 해방 이후 이념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공동의 기억을 이어갈 수 없었다.

6.25로 모든 기억이 먹고 사는 문제에 묻혀 버렸다.


유대인이라면 다르다. 엘리트로 부유하게 살다가 전쟁이 끝나 미국을 중심으로 다시 화려하게 부활하여 자기 역사를 기록해나가고 있다. 최근까지도 끝도 없이 우려먹는다. 나치와 같은 짓을 중동에서 반복하는 유대인을 보니 이제는 더이상 호감을 가질 수가 없다.


이 기록은 덤덤하다. 덤덤하게 인간의 공통된 한계 상황과 거기서 발생되는 사유라고 공감할 수 있겠으나 여전히 자신들이 역사의 주인공이라는 자의식이 없는 듯, 주인공으로(피해자로) 자리매김하게 하는 작업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래도 필사는 한다.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 안에서, 사랑을 통해 실현된다.


수용소에서는 신체적으로나 지적으로 원시적인 생활을 할 수밖에 없지만 영적인 생활을 더욱 심오하게 하는 것이 가능했다. 밖에 있을 때 지적인 활동을 했던 감수성 예민한 사람들은 육체적으로는 더 많은 고통을 겪었지만 정신적인 측면에서 내면의 자아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비교적 적게 손상당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혹한 현실로부터 빠져나와 내적인 풍요로움과 영적인 자유가 넘치는 세계로 도피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별로 건강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체력이 강한 사람보다 수용소에서 더 잘 견딘다는 지극히 역설적인 현상도 이것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p.68


그때 나는 한 가지 생각이 내 머리를 관통했다. 생애 처음으로 나는 그렇게 많은 시인들이 시를 통해 노래하고, 그렇게 많은 사상가들이 최고의 지혜라고 외쳤던 하나의 진리를 깨달았다. 그 진리란 바로 사랑이야말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이고 가장 숭관 목표라는 것이었다. 나는 인간의 시와 사상과 믿음이 설파하는 숭고한 비밀의 의미를 간파했다.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을 통해서, 사랑 안에서 실현된다'


그때 나는 이 세상에 남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그것이 비록 아주 짧은 순간이라고 해도) 여전히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극단적으로 소외된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없을 때, 주어진 고통을 올바르고 명예롭게 견디는 것만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일 때, 사람은 그가 간직하고 있던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으로 충족감을 느낄 수 있다. 내 생애 처음으로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의 의미를 이해하게 됐다.

'천사들은 한없는 영광 속에서 영원한 묵상에 잠겨 있나니.'


그때도 내 마음은 여전히 아내의 영상에 매달려 있었다.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나는 아내가 아직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몰랐다. 그러나 한 가지만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때서야 깨달은 것인데,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육신을 초워래서 더 먼 곳까지 간다는 것이었다. 사랑은 영적인 존재, 내적인 자아 안에서 더욱 깊은 의미를 갖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았든, 아직 살았든 죽었든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이렇게 내면 세계를 극대화함시킴으로써 수감자들은 멀리 과거로 도피해 자기 존재의 공허함과 고독감 그리고 영적인 빈곤으로부터 피난처를 찾을 수 있었다.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치며 과거 일들을 회상했다.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작은 헤프닝이나 사소한 것들이었다. 그 향수 어린 추억이 그들을 성스럽게 만들었으며, 때로는 이상한 업적을 가진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들이 세계와 그들의 존재가 현실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의 영혼은 그리움을 향해 먼 과거로 달려갔다. p. 72



희망을포기한 수용소에서 오히려 자연의 아름다움에 빠져들어 이렇게 생각한다. 그는 바바리아의 풍경을 보며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다니" 마치 풍경은뒤러의 유명한 수채화를 닮았다고 한다. 아마 이런 풍경이었을까?

 Landscape with Wood/Albrecht Dür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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