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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라 Jan 01. 2024

오래된 일기장

젊은날의 해방구

  안방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화장대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스치게 되는 나의 공간이다. 주로 거울을 보기 위함인데 아침에 일어나서 한번, 세수하고 한번, 얼굴에 뭐가 나서 한번. 수 없이 보고 또 보는 거울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서랍으로 손이 간 것인지 알 수는 없다. 그저 마음이 그랬다. 왠지 뭔가 뒤적이고 싶은 그런 날이었다.

     

  한번 정리해 놓으면 그곳은 유물처럼 오랜 시간 한 자리를 지키고 있어 보는 둥 마는 둥 어쩌다 눈에 스쳐도 존재만 확인하는 것이 있다. 양쪽으로 나뉜 3단 서랍 화장대의 왼쪽 두 번째 서랍이 그랬다. 수시로 열고 닫히는 다른 서랍들에 비해 오래된 수첩과 지금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과 찍은 사진 뭉치, 유효 지난 여권과 아직 유효한 여권, 그리고 중요할 수도 있는 보험약관들. 그 틈에 잘 숨겨진 까만 비닐 커버가 씌워진 두꺼운 노트 한 권이 늘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평소엔 눈길조차 가지 않는 것인데 갑자기 노트 안에 적혀있을 그 무언가가 몹시도 궁금해졌다. 호기심과 기대 속에서 조심스럽게 노트의 겉표지를 들어 올리니 1993년 7월에 시작되어 2008년 9월로 끝나는 이야기가 적혀있다. 결혼하여 두 해째를 맞이한 어느 날로부터 시작된 것이 둘째 아이 열 살 되던 해로 마감된 약 15년간의 일기였다. 비록 지난날의 내가 쓴 기록이지만 오래된 일기를 들춰보는 것에 묘한 긴장과 떨림이 일었다.     


  펜으로 한 글자씩 꾹꾹 눌러쓴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겨 갈 때 손끝에 느껴지는 투박함이 어색했다. 이제는 키보드로 타자하여 글을 만들고 컴퓨터에 저장하는 것이 익숙해서인지 어설프고 힘이 약한 나의 글씨들이 오히려 반갑기도 했다. 일기를 기록한 날의 수를 합쳐 보니 채 한 달에 미치지 않는다. 처음 몇 장은 아이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그다음은 누군가를 향한 불만족, 분노, 슬픔의 내용들로 가득 차 있었다. 대상은 직장 동료, 친구, 시댁 식구 등 다양했지만 대부분은 한집에서 살아가는 남편에게로 향해 있었다. 

    

  일기라는 것이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을 적는 것이라 나의 어제는 분명 오늘과 다르고 내일은 또 그와 다를 텐데도 일기 속의 날들은 늘 깊고 어두웠다. 결국 힘들고 어려울 때만 일기를 썼다는 것인데 그 숱한 날들 동안 기쁘고 행복한 일을 담지 않은 것이 속상했다. 두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는 과정에서 함께 보낸 평화롭고 가슴 벅찼던 순간들, 남편과 함께한 달콤하고 미세한 감정들, 늘 좋을 수는 없지만 온 가족이 둘러앉아 낄낄 깔깔대던 행복의 순간 모두가 없었다.


  한때 네 잎 클로버를 열심히 찾은 적이 있다. 많고 많은 세 잎 클로버 가운데 네 잎 클로버를 찾아 행운의 복권 당첨을 기대했건만 동네 슈퍼의 행운권 추첨조차 당첨되는 운은 따라주지 않았다. ‘어리석은 인간은 지천으로 깔린 행복을 의미하는 세 잎 클로버는 본 체도 하지 않고 행운을 준다는 네 잎 클로버만 찾는다.’라는 말을 위안 삼으며 더 이상의 네 잎 클로버 찾기를 멈춘 일이 떠오른다.     


  어쩌면 지난날 나의 일기는 세 잎이 아닌 네 잎 클로버 찾기에 급급하다 정작 일상의 고마움을 놓친 것만 같았다. 20대 청춘인 지금의 딸아이는 내 눈에 늘 어리고 불안해 보인다. 그런 나이에 아이를 낳고 키우며 일상생활을 이어 가기가 절대로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15년간 쓴 일기가 채 한 달을 채우지 못한 것이리라. 나의 보살핌이 필요한 어린 자식과 때때로 정말 남 같이 느껴지던 남편, 친정과 시댁 식구들, 그리고 직장생활.     


  내 젊은 20대, 30대는 말 그대로 하루하루 살아 내기에 바빴다. 하지만 조금만 더 배려하고 포용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어쩌면 지금의 민망하고 아쉬운 일기장을 마주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어둡고 혼란스러운 젊은 시절 일기는 나만의 전유물은 아닌가 보다. 어떤 이는 보는 것만으로도 우울하여 찢어버렸다 하고, 또 다른 이는 장롱 깊숙이 숨겨놓았다는 말에 공감의 위로를 받는다. 오래된 일기에 쓰여있는 글자들은 지금도 강한 열기를 품고 있지만 그 시절 나의 마음을 들끓게 했던 일들이 살아 보니 별거 아니라는 생각에 그때는 너무 젊어 미숙했다고 위로하고 싶다. 긴 시간을 걸어온 지금 이 자리에서 아쉽고 안타까운 것은 기쁨의 순간들을 기록에서 놓쳐버린 것이다.     


  한 줄 일기, 여행 일기, 감사 일기 등 이름만 바꿔 붙일 수 있는 수많은 형태의 일기가 있다. 지난날 남편과 연애 시절에 교환 일기라는 것을 썼는데 간혹 삽화를 그려 넣기도 하고 멋있는 격언과 함께 낯 간지럼 말을 섞어가며 페이지를 채워 넣었다. 30년이 훨씬 지난 지금 그 일기는 개봉하지 않은 이삿짐 상자 안에 꼭꼭 숨어 있다. 민망함과 창피함이 몰려올 것 같아 선뜻 열어볼 엄두를 내고 있지 못하는 것이다. 이참에 새로운 교환 일기를 써보자고 남편에게 권해 볼까 싶기도 하지만 이것 역시 훗날 부끄러움 한 사발 더 얹는 것 같아 지워버린다.      


  오래된 일기장은 매일 새로움과 힘겨운 겨루기를 해야만 했던 내 젊은 날에 마음을 풀어놓는 해방구였을 것이다. 나는 이제 매일 배우며 느끼는 소소한 삶의 기쁨을 새로운 기록으로 채우고 싶다. 10년 후, 어쩌면 그보다 먼 날에 다시 읽는 일기로 행복한 나를 꿈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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