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날의 해방구
안방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화장대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스치게 되는 나의 공간이다. 주로 거울을 보기 위함인데 아침에 일어나서 한번, 세수하고 한번, 얼굴에 뭐가 나서 한번. 수 없이 보고 또 보는 거울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서랍으로 손이 간 것인지 알 수는 없다. 그저 마음이 그랬다. 왠지 뭔가 뒤적이고 싶은 그런 날이었다.
한번 정리해 놓으면 그곳은 유물처럼 오랜 시간 한 자리를 지키고 있어 보는 둥 마는 둥 어쩌다 눈에 스쳐도 존재만 확인하는 것이 있다. 양쪽으로 나뉜 3단 서랍 화장대의 왼쪽 두 번째 서랍이 그랬다. 수시로 열고 닫히는 다른 서랍들에 비해 오래된 수첩과 지금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과 찍은 사진 뭉치, 유효 지난 여권과 아직 유효한 여권, 그리고 중요할 수도 있는 보험약관들. 그 틈에 잘 숨겨진 까만 비닐 커버가 씌워진 두꺼운 노트 한 권이 늘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평소엔 눈길조차 가지 않는 것인데 갑자기 노트 안에 적혀있을 그 무언가가 몹시도 궁금해졌다. 호기심과 기대 속에서 조심스럽게 노트의 겉표지를 들어 올리니 1993년 7월에 시작되어 2008년 9월로 끝나는 이야기가 적혀있다. 결혼하여 두 해째를 맞이한 어느 날로부터 시작된 것이 둘째 아이 열 살 되던 해로 마감된 약 15년간의 일기였다. 비록 지난날의 내가 쓴 기록이지만 오래된 일기를 들춰보는 것에 묘한 긴장과 떨림이 일었다.
펜으로 한 글자씩 꾹꾹 눌러쓴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겨 갈 때 손끝에 느껴지는 투박함이 어색했다. 이제는 키보드로 타자하여 글을 만들고 컴퓨터에 저장하는 것이 익숙해서인지 어설프고 힘이 약한 나의 글씨들이 오히려 반갑기도 했다. 일기를 기록한 날의 수를 합쳐 보니 채 한 달에 미치지 않는다. 처음 몇 장은 아이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그다음은 누군가를 향한 불만족, 분노, 슬픔의 내용들로 가득 차 있었다. 대상은 직장 동료, 친구, 시댁 식구 등 다양했지만 대부분은 한집에서 살아가는 남편에게로 향해 있었다.
일기라는 것이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을 적는 것이라 나의 어제는 분명 오늘과 다르고 내일은 또 그와 다를 텐데도 일기 속의 날들은 늘 깊고 어두웠다. 결국 힘들고 어려울 때만 일기를 썼다는 것인데 그 숱한 날들 동안 기쁘고 행복한 일을 담지 않은 것이 속상했다. 두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는 과정에서 함께 보낸 평화롭고 가슴 벅찼던 순간들, 남편과 함께한 달콤하고 미세한 감정들, 늘 좋을 수는 없지만 온 가족이 둘러앉아 낄낄 깔깔대던 행복의 순간 모두가 없었다.
한때 네 잎 클로버를 열심히 찾은 적이 있다. 많고 많은 세 잎 클로버 가운데 네 잎 클로버를 찾아 행운의 복권 당첨을 기대했건만 동네 슈퍼의 행운권 추첨조차 당첨되는 운은 따라주지 않았다. ‘어리석은 인간은 지천으로 깔린 행복을 의미하는 세 잎 클로버는 본 체도 하지 않고 행운을 준다는 네 잎 클로버만 찾는다.’라는 말을 위안 삼으며 더 이상의 네 잎 클로버 찾기를 멈춘 일이 떠오른다.
어쩌면 지난날 나의 일기는 세 잎이 아닌 네 잎 클로버 찾기에 급급하다 정작 일상의 고마움을 놓친 것만 같았다. 20대 청춘인 지금의 딸아이는 내 눈에 늘 어리고 불안해 보인다. 그런 나이에 아이를 낳고 키우며 일상생활을 이어 가기가 절대로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15년간 쓴 일기가 채 한 달을 채우지 못한 것이리라. 나의 보살핌이 필요한 어린 자식과 때때로 정말 남 같이 느껴지던 남편, 친정과 시댁 식구들, 그리고 직장생활.
내 젊은 20대, 30대는 말 그대로 하루하루 살아 내기에 바빴다. 하지만 조금만 더 배려하고 포용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어쩌면 지금의 민망하고 아쉬운 일기장을 마주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어둡고 혼란스러운 젊은 시절 일기는 나만의 전유물은 아닌가 보다. 어떤 이는 보는 것만으로도 우울하여 찢어버렸다 하고, 또 다른 이는 장롱 깊숙이 숨겨놓았다는 말에 공감의 위로를 받는다. 오래된 일기에 쓰여있는 글자들은 지금도 강한 열기를 품고 있지만 그 시절 나의 마음을 들끓게 했던 일들이 살아 보니 별거 아니라는 생각에 그때는 너무 젊어 미숙했다고 위로하고 싶다. 긴 시간을 걸어온 지금 이 자리에서 아쉽고 안타까운 것은 기쁨의 순간들을 기록에서 놓쳐버린 것이다.
한 줄 일기, 여행 일기, 감사 일기 등 이름만 바꿔 붙일 수 있는 수많은 형태의 일기가 있다. 지난날 남편과 연애 시절에 교환 일기라는 것을 썼는데 간혹 삽화를 그려 넣기도 하고 멋있는 격언과 함께 낯 간지럼 말을 섞어가며 페이지를 채워 넣었다. 30년이 훨씬 지난 지금 그 일기는 개봉하지 않은 이삿짐 상자 안에 꼭꼭 숨어 있다. 민망함과 창피함이 몰려올 것 같아 선뜻 열어볼 엄두를 내고 있지 못하는 것이다. 이참에 새로운 교환 일기를 써보자고 남편에게 권해 볼까 싶기도 하지만 이것 역시 훗날 부끄러움 한 사발 더 얹는 것 같아 지워버린다.
오래된 일기장은 매일 새로움과 힘겨운 겨루기를 해야만 했던 내 젊은 날에 마음을 풀어놓는 해방구였을 것이다. 나는 이제 매일 배우며 느끼는 소소한 삶의 기쁨을 새로운 기록으로 채우고 싶다. 10년 후, 어쩌면 그보다 먼 날에 다시 읽는 일기로 행복한 나를 꿈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