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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라 Jan 02. 2024

김밥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우와 김밥이네! 역시 엄마가 집에 있으니 좋군.”


  모처럼 간식으로 김밥을 만들었더니 아이들이 너무도 좋아한다.     

  2년에 한 번씩 의무적으로 하는 건강검진은 괜스레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검진에 필요한 이러저러한 검사를 마치고 나니 온몸에 힘이 없었다. 휘청휘청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는데 김밥 생각이 그윽해져 집 앞 조그만 마트에 끌리듯 들어가 단무지와 햄을 포함한 김밥 재료 한 개씩을 사 들고 나왔다.

     

  나에게 김밥은 그리 유쾌한 음식은 아니었다. 학창 시절 봄가을이면 학교 행사로 소풍-요즘엔 이런 학교 활동을 체험학습이라는 말로 부른다-을 가는데 친구들 대부분은 점심 도시락으로 김밥을 가져왔다. 손끝이 야무진 나의 엄마는 김밥을 작고 예쁘게 말아 친구들은 “너희 엄마 김밥은 귀엽다”라며 자기들 것과 바꾸어 먹기 좋아했다.

     

  소풍은 학창 시절 내내 손꼽아 기다리던 즐거운 날이었다. 아주 가끔이기는 하지만 명절처럼 새 옷과 새 운동화가 생기기도 하고 맛있는 간식거리도 함께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걱정스러운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날씨였다. 대부분 간절기라 그런지 날씨는 늘 변덕스러웠고 맑은 날보다 바람이 불거나, 흐리거나, 아니면 여우 시집가는 날씨였다. 해는 높이 떠서 맑은 날에 느닷없이 비가 내리면 여우는 왜 시집을 갔을까? 친구들과 날씨를 탓하며 보물찾기, 장기자랑 등 온갖 떠들썩한 활동을 하고 나면 꼬르륵거리는 소리와 함께 배고픔은 극에 달한다.

      

  후다닥 친구들과 삼삼오오 둘러앉아 귀하게 모셔놓은 가방 안의 도시락을 꺼내어 펼쳐 놓는다. 날씨 때문이었을까? 찬바람이 휙 한 바퀴 돌고 나면 맛있는 김밥이 식도를 따라 데굴데굴 굴러가다 배속 어디쯤에서 멈춰서 버린다. 온몸이 싸늘해지며 목에서부터 뭔가 차곡차곡 쌓이는 심상치 않은 기분을 느끼게 되는데, 이런 날은 늘 체해서 온갖 소화제와 바늘을 동반한 민간요법으로 힘든 밤을 보내곤 했었다. 그러니 나에게 김밥은 애써 찾고 싶은 음식이 아니었고 만드는 수고는 아예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어린이집을 다니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1주일에 한 번씩 야외수업을 하는 날에는 나의 기호와 상관없이 김밥을 싸야만 했는데, 남편과 함께 이른 새벽에 일어나 재료 손질에서부터 도시락을 완성하기까지 2시간의 분주한 아침을 보내고 허겁지겁 출근하곤 했었다.

     

  시금치를 삶아 한쪽에 식혀놓고 달걀을 톡톡 깨서 지단을 부친다. 잘 익은 달걀지단은 세로로 길게 썰어, 기름에 살짝 볶아진 당근 옆에 얌전하게 놓는다. 김밥에 빠질 수 없는 햄도 살짝 볶고 단무지는 물기가 잘 빠지도록 망에 받쳐 놓는다. 그렇다. 먹는 사람은 간편하게 한입에 쏙 넣어서 먹으면 되는 것이 만드는 사람에겐 참으로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다. 온갖 재료를 지지고 볶아 한데 모아야 비로소 한 개의 음식이 된다.

      

  이 얼마나 비효율적인가? 잡채도 마찬가지다. 한 개의 조리 과정을 거쳐 한 개의 요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속 재료가 열 개라면 열 개의 조리가 한 개의 음식을 만드는 것이다. 뭘 못하는 사람이 양으로만 승부를 내려 한다고 말할지언정 밥상에 열 개의 재료로 만든 열 개의 음식이 차려진다면 한 개의 음식보다는 풍성하지 않겠는가? 음식으로 효율성을 따진다는 것이 우습기는 하지만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을 위한 김밥은 달랐다. 요런 생각들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힘들게 새벽을 깨우며 만드는 비효율의 결정체이었지만 맛있게 먹고 힘차게 뛰노는 아이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고달픔은 봄 눈 녹듯 자취를 감추고 행복감만 남아 있었다.

     

  밥에 참기름과 깨소금을 섞으니 고소한 냄새가 온 집안에 퍼진다. 김밥 준비가 다 되었으니 이제 김만 말아주면 된다.

      

  “엄마 김밥은 작아서 먹기 좋아요”  

   

  김을 마는 나의 손이 친정엄마의 손을 닮았나 보다. 김밥으로 차오르는 아이들의 부푼 볼은 언제봐도 귀엽다. 이렇게 김밥은 바라만 봐도 기분 좋은 음식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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