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에 담긴 이야기 - 여름
나는 여름을 좋아한다.
여름이 주는 초록빛과 싱그러운 숲의 모습, 비록 덥지만 이따금 계곡이나 바다로 피서를 가면 언제 더웠냐는 듯 금세 시원해지는 것이 나에게는 큰 행복을 줬다.
특히 여름은 소리마저 다르다. 매미 소리가 귓가를 가득 메우고, 장마비가 후두둑 떨어지며 흙냄새와 풀냄새가 섞여 들어올 때면 계절이 바뀌고 있음을 온몸으로 실감하게 된다.
이 계절이 오면 나는 자연스레 밥상 위의 변화를 기대하게 된다.
내게 여름은 단순히 더운 계절이 아니라, 엄마가 만들어 주는 ‘여름의 맛’을 만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엄마에게 “좋아하는 음식이 뭐예요?”라고 물으면, 엄마는 늘 “제철 음식”이라고 대답하곤 했다.
엄마는 계절의 변화를 음식으로 느끼는 사람이었다.
봄에는 냉이된장국, 가을에는 고구마순볶음, 겨울에는 매생이 굴국처럼 계절이 바뀔 때마다 밥상 위에는 자연의 시간이 올랐다.
그리고 여름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음식이 바로 호박잎쌈과 강된장이었다.
해마다 여름이 오면 엄마는 시장에서 할머니가 파시는 호박잎을 사 왔다.
시장 비닐봉투에서 막 꺼낸 호박잎은 푸른빛이 진했고, 잎맥에는 햇볕을 가득 머금은 듯 힘이 있었다.
엄마는 “잎이 클수록 맛있어”라고 말하며 하나하나 살펴보곤 했다.
집에 돌아오면 엄마와 나, 언니는 곧장 부엌에 둘러앉아 호박잎을 손질했다.
줄기에 억센 섬유질을 벗겨내고, 만지면 까슬까슬한 잎을 조심스럽게 다듬었다.
섬유질을 벗길 때마다 ‘슥’ 하고 들리는 소리와 함께 풋풋한 초록 향이 손끝에 남았다.
그 향은 시간이 지나면서 거실 가득 퍼졌고, 오늘 저녁이 호박잎쌈이라는 걸 알리는 신호가 되었다.
엄마는 손질된 호박잎을 깨끗이 씻어 찜기에 차곡차곡 올려두었다.
한편으론 호박, 감자, 양파를 큼직하게 썰어 두었는데, 그 모습은 마치 여름 햇살을 잘라 넣은 것처럼 생기가 넘쳤다.
멸치 육수를 자박하게 끓여 된장을 풀면, 집 안에는 금세 구수한 향이 퍼졌다.
엄마는 늘 그냥 된장이 아니라 색이 짙고 맛이 깊은 막장을 사용했는데, 그것이야말로 우리 집 강된장의 비밀이었다.
냄비에서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소리, 콧속을 자극하는 청양고추의 매운 향, 그리고 찜기에서 익어가는 호박잎의 고소한 냄새까지 더해지면 부엌은 어느새 여름의 무대가 되었다.
우리 가족은 식탁에 둘러 앉아 여름의 밥상을 함께 했다.
푹 익은 호박잎이 아니라 약간 아삭한 호박잎을 손에 한 장 올리고,
고슬고슬한 현미밥과 강된장에 있는 감자, 호박, 멸치를 올려 한 입에 넣으면
호박잎 특유의 향기와 멸치의 짭조름한 감칠맛, 청양고추의 매콤함, 막장의 진한 구수함이 입 안 가득 퍼졌다.
우리 가족은 모두 한 손에는 호박잎을, 다른 손에는 강된장을 바쁘게 올리며 먹었다.
어느 정도 호박잎쌈을 먹고 나면 손은 어느새 초록빛으로 변했고, 우리는 그 변한 손을 보며 웃었다.
손이 초록빛이 될 때까지 호박잎쌈을 먹던 추억은 지금도 여름만 되면 호박잎과 강된장을 그리워하게 한다.
아직도 나는 이 강된장의 정확한 레시피를 모른다.
어느 날 엄마에게 물어보았을 때, 엄마는 “이건 나도 엄마한테 배운 거야. 그냥 여름이면 먹는 음식이지”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 속에는 특별한 비밀의 조리법이 아니라, 단순히 계절을 함께 살아내는 가족의 시간이 담겨 있었다.
호박잎은 그렇게 세대를 거쳐 나에게까지 왔다.
훗날 내가 엄마가 된다면, 나 역시 여름마다 내 아이들에게 호박잎쌈과 강된장을 해줄 것 같다. 우리 엄마가 그랬듯이 나 역시도 여름의 향기를 그리워하며 이 맛을 가족들과 나누고 싶다.
거창한 ‘전통’이라는 말이 아니더라도, 어느새 호박잎은 우리 가족의 전통이 되어 3세대를 이어온 음식이 될 것이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로 접어들고 있는 요즘,
내가 사랑하는 계절이 지나가는 건 아쉽지만 내년 여름에 다시 먹게 될 호박잎쌈을 기다리며 한 해를 마무리한다.
음식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채우는 일이라는 것을 호박잎쌈이 가르쳐 주었다.
한 장의 호박잎 속에는 여름의 향기와 엄마의 손길, 그리고 웃음 가득했던 가족의 식탁이 담겨 있다.
그래서 나는 계절이 바뀌어도 늘 여름을 기다리며, 그 기다림 속에서 가족의 의미를 다시 새긴다.
언젠가 내가 이 음식을 내 아이들과 함께 먹을 때, 지금 내가 느끼는 그리움과 따뜻함이 아이들의 추억 속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