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대학생 때만 했어도 대학생들이 취직하고 싶은 기업 3위안에 삼성전자는 항상 있었던 것 같아. 나도 그때는 막연하게 삼성전자에 정말 가고 싶었어. 심지어 SK에 붙었는데 OT날이 삼성전자 인적성 시험 날이 겹쳤던 적이 있었어. OT에 참여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탈락이었지만, 나는 당연하게 삼성전자 인적성 시험을 보러 갔었어. 그때는 무모했건 건지 자신 있었던 건지, 지금 만약 똑같은 상황이 생기면 나는 두 번 생각도 안 해보고 OT에 참석할걸?
아직까지 남아있는 건 4개 뿐 다 잃어버렸다. 아무튼 그만큼 나는 삼성에 대한 동경심과 바람이 있었던 것 같아. 다행히 인적성 시험은 무사히 합격을 했고 이제 남은 건 면접뿐이었지. 지금 생각해보면 이 시기에 나는 정말 정신없었던 것 같아. 졸업논문을 1학기 때 일찍이 쓰지 않아 2학기 때 부랴부랴 쓰느라 학교에 있는 시간이 길어졌고, 이때 아버지가 뇌종양 수술이라는 큰 수술을 해서 서울에 있는 병원도 자주 들렸었어.
이 시기에 여자 친구가 있었는데, 자연스럽게 나에게 있어 그 친구의 우선순위는 저 멀리 밀어져 버린 것 같아. 결국 그 친구가 먼저 헤어지자 말을 꺼냈고, 나는 담담하게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알겠다고 했어. 그때는 내 현재 사정을 구구절절 설명하기 싫었어. 단지 그게 다야. 그래도 2년을 가까이 만난 사람이라 헤어지니 빈자리가 크긴 하더라. 하지만 그럴 슬픔도 느낄만한 여유가 없었어.
삼성뿐만 아니라 다른 대기업 면접까지 겹치며 하나하나 준비했고, 게다가 기말고사에 팀플은 어찌나 많던지, 집은 그저 잠을 자러 오는 곳이었어. 얼마나 바빴으면 그때는 힘들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 그저 눈앞에 닥치 상황들을 게임하듯 하나씩 해결해 나가는 것에 집착하고 있었지.
버티고 버티다 보니 결국 하나씩 다 잘 풀리더라. 삼성에서는 최종 합격이라는 메일과 함께 꽃바구니가 부엌 탁자 위에 배달이 되어있었고, 아버지의 수술을 잘 마무리되어 일상으로 돌아왔으며 대학교 졸업도 무사히 할 수 있었지.
자 그럼 이제 내가 그토록 바랬던 삼성에 들어갔으니, 나의 인생은 행복하게 끝이 날까?
안타깝게도 나의 사주는 그걸 허락하지 않았어.
삼성에서의 일상은 그저 단순 반복 작업이었어. 나는 시공 관리자로 일하면서 협력업체에게 일을 시키고, 문제를 보고받으면 해결해서 다시 지시하고, 그리고 서류를 준비하는 게 전부였어. 물론 관리자라는 직책이 나쁘다는 건 아니야. 그저 하루 종일 매일 휴대전화만 붙잡고 업무를 지시했으니, 10년 차 과장님도 하는 일이 나랑 별반 다를 게 없더라.
한마디로 삼성에서의 일상은 불행했어.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그저 막연하게 삼성에 입사하고 싶다는 생각만 했어. 입사를 하고 싶은 구체적인 이유도 없었고, 목표도 없었어. 그냥 남들이 바랬던 회사니 나도 동경을 하게 된 거뿐이었어.
나의 불행했던 일상은 어찌 보면 당연했던 결과라 생각해.
아무런 목표도 없었고 동기부여도 없었어.
그저 일하기 위해 커피를 사마셨고, 일하기 위해 밥을 먹었으며, 다음날 일하기 위해 잠에 들었어.
나는 삼성에서 일하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지 못했고, 일을 해내는 것에 보람을 느끼지 못했으며, 나의 일상은 색을 잃어버린 흑백에 불과했어.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나는 회사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하나의 행복도 느끼지 못했어.
아 한 가지, 연초에 들어오는 보너스를 봤을 때는 조금 행복했었어.
삼성에서의 일상. 그래도 불행했던 일상 속에서 얻은 것은 있었어.
알람을 해두지 않아도 매일 아침 6시에 스스로 일어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고, 직장 상사가 말도 안 되는 업무를 주거나 이유 없이 시비 걸었을 땐, 그 사람의 눈을 보고 내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어. 나는 생각보다 부지런했고, 예상치 못한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었어.
나는 직장 생활을 통해, 나를 정의할 수 있는 명사들을 넓혀 나갈 수 있었어.
그리고 나는 하고 싶은 것은 반드시 해봐야 직성이 풀린다는 사람인 것도 알았지.
나의 짧았던 직장인은 좋지 못한 기억으로 남게 되었지만, 혹시 알아? 나중에 다시 직장에 들어가게 될지.
이렇게 써보니, 회사를 뛰쳐나온 나는 뭐라도 되는 것 같은 사람이고, 회사에 남은 사람은 용기가 없어 마지못해 다니는 것처럼 느껴지네. 그건 절대 아니야.
나는 직장인들을 모두 존경해. 그들은 지켜야 할 무엇인가가 있기에, 부모님, 아내, 자식들, 아니면 고양이 또는 강아지, 목표 혹은 야망.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하루하루 녹초가 되어도 내일 또 출근을 할 수 있는게 아닐까?
나는 단지 목표가 없었고 꿈이 없었으며, 지켜야 할 무언가를 가지고 있지 않았어. 단지 재미를 찾아 떠났지.
나도 언젠가는 무언가를 지켜야 할 책임감을 가지고, 목표가 있는 삶을 살길 바라며.
그리고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고 있는 대한민국 직장인들에게, 그들의 일상을 존경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