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야기봄 Dec 31. 2023

꼼꼼하게 그림책 보기 5

『신기한 그림족자』를 보고

    2000년대 초반 『아씨방 일곱 동무』, 『오러와 오도』등 옛이야기를 통해 소중한 메시지를 그림책에 담아냈던 이영경 작가가 2002년에 낸 『신기한 그림족자』는 전우치전에 나오는 한자경 이야기이다.  

    

표지를 보면 마지못해 문을 여는 고지기의 표정과 욕심 가득한 한자경의 얼굴이 대비를 이뤄 흥미롭다. 면지는 족자의 가장자리 문양이다. 족자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전우치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다음 장면은 날아다니는 전우치 아래로 섬뜩하리만치 처참한 가난을 보여준다. 거적에 둘둘 말려 발과 머리끝만 살짝 보이는 푸르스름한 시신과 거동도 못 할 듯 힘없는 노모, 먹을 것은 쌀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아 지붕까지 올라간 듯한 쥐들, 마당에 있는 개마저 처량하다. 불쌍히 여긴 전우치의 도움으로 한자경은 신기한 그림 족자를 얻는다. 설마 하는 마음에 ‘고지기야’ 하고 불러 놓고는 고지기가 나타나자 방문이 부서질 정도로 한자경은 놀란다. 족자에서 뜯어낸 듯 고지기의 모습에는 아우라처럼 테두리가 있다. 백 냥으로 장례를 치르니 검소하기 그지없다. 정작 상주인 한자경은 상복도 못 입었으니 말이다. 장례를 치르고 한자경은 소박한 행복을 누린다. 지붕 위에 고추도 말리고 처마엔 메주도 달려 있고 감도 말리고 있다. 마당엔 닭과 병아리가 평화롭고 강아지의 발걸음도 가볍다. 한자경은 생선 살을 발라 노모의 숟가락에 얹으며 웃음 짓는다. 한 냥, 최저 생계는 보장이 되어야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으련만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어진다는 인간의 욕심처럼 한자경은 백 냥을 당겨 쓰고 싶어지면서 행운처럼 찾아온 작은 행복을 잃는다.     


국밥집에 앉아 있는 한자경과 그 뒤로 보이는 장터의 분위기는 살아 있는 듯하다. 조랑말을 타고 가는 아녀자부터 장바닥에 앉아 장기를 두는 모습까지 저마다의 이야기가 꿈틀댄다. 애걸복걸 백 냥을 타기 위한 비굴하기 짝이 없는 한자경의 얼굴과 앞날을 예고하듯 고지기의 손에서 튕겨 버리는 한 냥. 백 냥을 담아 나오려는 한자경을 근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금동 삼존불과 임금의 못된 욕심처럼 흉하게 변해 버린 곳간의 모습도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옛이야기를 들려주듯이 쓰인 글에 의성어 의태어를 가득 담아 읽는 맛이 좋다. 동그란 한자경의 얼굴은 밉기도, 측은하기도 한 독특한 캐릭터를 만들었다. 족자의 직선을 제외하면 그림 대부분이 구불구불해서 부드럽기도 하고 친근하기도 한데 작가가 일부러 왼손으로 그렸다니 더욱 놀랍다. 장면마다 동적인 모습을 잘 담아서 읽기에도 좋고 보기에도 좋은 그림책이 됐다. 좋은 그림책을 책꽂이에 두고 행복을 느낀다면 매일 한 냥씩 나오는 신기한 그림 족자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20년 전 그림책을 보고 그때나 지금이나 즐겁게 감상할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곧 새해가 밝을 텐데 욕심 없이 가진 것에 만족하며 나답게 살아야겠다.     


작가의 이전글 꼼꼼하게 그림책 보기 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