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영편지 26

by 순례자

사랑하는 아들아


아침 햇살이 눈부신 토요일 아침이다. 출근했다. 잡다한 할 일이 있어 기쁜 마음으로 왔다.
교정의 목련 꽃눈이 한껏 부풀었고, 복숭아, 살구꽃 꽃망울이 쌀알만 하게 매다려 있는 것을 보니 봄은 오고야 말았다. 올 겨울이 유난히 춥고 길고 지루했던 것은 우리 아들이 곁에 없어서 이겠지.


나는 이따금 나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 본다. 학생들에게는 "고교 시절은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란다. 공부에 파묻혀 살 수밖에 없는 현실이지만, 이따금 고개를 들고 푸른 하늘을 보렴. 하늘을 나는 새도 보고 파랗게 싹을 틔우는 나무도 보며 살아 있다는 기쁨을 가슴 가득 느껴보렴. 그리고 나는 어떤 일을 하며 살 것인가? 어떤 일을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를 고민하고 진로를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라고 말하곤 한다. 그런데 정작 나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이 평생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었을까? 이 일로 인해 행복했나?를 반문하게 된다.


교사로서 학생들과 어울려 살면서 소통하고 가르치는 일은 재미있었지만, 입시에 매몰돼서 학생들 모두를 경쟁자로 삼아야 하는 치열한 교육 현장이 싫었다. 그래서 삶의 다양성을 경험하며 치열하게 살면 삶에 생기를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일을 했다. 고등학교 수업을 마치면 곧바로 이화여자대학교 언어교육원으로 달려가서 재학생을 대상으로 한 국어 작문 그리고 외국인 교환학생과 주재원을 위한 한국어 강사, EBS 관련 퀴즈 출제 등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겸업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8년을 생활하고 나니 그것도 또 다른 다람쥐쳇바퀴 굴리는 삶의 연장이라는 것을 알게 됐을 뿐이었다.


그래서 엄마와 의논해서 새로운 시도를 모색하다가 결국 재외국민을 위한 해외교사를 찾게 됐고 초등학교 2학년을 마친 너를 데리고 중국을 거쳐 홍콩으로 가게 된 것이란다. 돌아보면 이곳에서도 아빠는 치열하게 살았다. 한국국제학교 교사로 익숙해진 다음에는 현지 한인 자녀를 위한 토요학교, 홍콩중문대학교의 한국어 과정 강사 등을 겸업해서 9년을 넘게 지속했다. 그리고 학기 사이의 나머지 공백 시간은 가족 여행으로 채웠다. 아마도 중국과 동남아 대부분의 나라는 엄마와 우리 아들과 함께 돌아다니지 않았을까?


정신없이 살았던 아빠의 기쁨의 중심에는 해마다 뚜렷한 성장을 보여준 너를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아빠가 어느 자리에 있든 무슨 일을 하든 열정을 다해 사는 아빠의 삶이 전혀 힘들지 않았고, 한국의 모든 것을 뒤로하고 해외를 떠도는 것이 전혀 후회되지 않았다.너만 생각하면 아빠는 걷다가도 웃음이 나왔고 눈을 감아도 아빠의 머릿속에서 네가 반짝였다.


나는 지금껏 무엇을 하고 정신없이 살았나? 하는 내적 반성 뒤에는 언제나, 아들을 데리고 중국을 거쳐 홍콩에 와서 살면서 다양한 세상을 네가 직접 경험하며 살게 했다는 결단이 아빠의 일생에 가장 잘한 일이라고 스스로 위안하고 있다. 네가 스스로 꿈을 꾸며 잘 성장해 줘서 고맙구나. 또한 그곳에서 다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감격도 경험했다. 그래서 홍콩은 아빠 인생에 가장 아름다운 추억의 공간이다.


엄마, 아빠는 우리 아들이 어떤 사람으로 성장할지 많이 궁금하단다. 그렇다고 큰 부담 갖지 말아라. 이제까지 엄마 아빠 곁에서 우리의 기쁨이 되어준 네 존재 그 자체로 감사하고 만족한다.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에벤에셀의 하나님이 앞으로 우리 아들을 어떤 그릇으로 쓰실지 기대와 흥미가 될 뿐이란다.


엄마 아빠가 네가 어떤 사람이 될지 궁금한 것은 네가 재능이 많기 때문이다. 언어, 문학, 예술적 감수성이 뛰어나고 운동 능력도 좋아서 어떤 진로를 선택할까 늘 궁금했다. 자연환경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만, 너의 상상력 속에는 언제나, 아침 햇살과 푸른 하늘, 한가롭게 떠가는 흰구름이 펼쳐진 것을 보았다. 그곳에서 자유롭게 상상력을 발휘하며 지성의 폭을 확장하며 감성의 깊이를 더하는 우리 아들의 모습을 자주 보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 편지를 받는 기쁨이 더없이 크지만, 하루 훈련의 피로가 쏟아지는 점호 시간 뒤에 이불속에서 편지를 쓰고 있는 아들을 상상하는 것은 오히려 안쓰럽다. 1시간은 족히 걸릴 텐데. 그 시간에 마음 놓고 잠을 청하면 좋겠다.


우리는 네가 편안하게 하루를 마무리하고 주께 감사하며 달콤한 잠 속으로 빠지기를 바란다. 네가 군생활에 잘 적응하고 창조적으로 시간을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데, 우리에게 소식을 전하느라 잠을 빼앗기면 안 될 것 같다. 그저 우리 편지를 읽는 것으로 이따금의 지루함을 한 순간이라도 떨쳐내면 좋겠다.


매 순간 우리 하나님의 도우심과 축복과 보호가 우리 아들과 함께 하는 동료들의 군생활에 함께 하시길 간구한다.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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